“신영병원이라, 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며칠 후 그가 나를 불렀다.
“내가 병원 지을 땅을 줄 테니까 병원은 자네가 만들게.”
“정말입니까?”
“대신, 내 큰아들 이병봉하고 지분을 반반 나눠가져야겠네. 병봉이의 생활기반을 마련하는데도 기여해주어야겠기에 말이야. 무엇보다도 병봉이를 자네와 같은 최고의 외과의사라 만들어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그 땅은 청계2가에 있는 100평가량 되는 공지였는데, 위치상으로 아주 좋은 장소였다. 현재 삼일빌딩 건너편에 있는 자리다. 부지는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건축할 돈이었다. 1965년 초, 건축비로 최소한 2천만 원이 필요했다. 그 외에 의료장비도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몇 년 전 휘플 수술을 해주었던, 두산그룹의 박두병 회장을 찾아가 D토건에 병원건축을 부탁했다. D토건과의 교섭에서 나는 빌린 돈 500만원을 선금으로 주고, 잔금은 공사 진행에 따라 그때그때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어디 가서 천만 원을 구하겠냐는 것이었다. 시공회사에서는 돈을 재촉하지, 가진 돈은 없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 맸다.
공사대금 압력을 받아 다급해하고 있을 때, 매부가 친구의 회사를 소개해주었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내 친누이동생의 남편인 조형규(훗날 동양나일론 사장까지 역임한 후 은퇴)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졸업하고 효성그룹 산하 동양나일론의 상무로 근무하고 있었다.
매부가 소개해준 그 친구는 서울대학교 상대 동기생으로 외국에서 재료를 들여와 가공 수출하는 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신용장과 담보를 은행에 넣으면, 무역금융을 이용해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건축 중이던 신영병원의 땅을 은행에 저당 잡히게 하고 그 회사에서 쓴 무역금융 중에 자금 천만 원을 무이자로 빌렸다. 무이자라는 말에, 일단 이담 씨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흔쾌히 은행에 병원을 볼모로 돈을 빌린 것이다.
건평 300평에 지하실과 1, 2층이 완공된 가운데 지상 3층의 골조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는 병원을 꾸려나갈 사람을 영입하는데 신경을 썼다. 나는 현직 서울대 의대 교수라서 버젓이 개업의로 나설 수 없었다. 개업원장으로 영입할 사람은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으면서 수준 있는 의사여야 했다. 결국 백병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서상완 박사를 초대 신영병원장으로 초빙했고, 함께 일할 직원 스무 명을 선임했다.
백병원에서 인연을 맺은 전상욱 씨는 신영병원 공사가 시작될 무렵에 백병원을 그만두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매일 숙식하면서 마취와 간단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하는 법을 배웠다. 엑스선 촬영 역시 단순한 촬영은 물론 현상하는 것도 배우게 했다. 모든 비용과 잡비는 조교수 월급을 쪼개어 해결했다.
신영병원의 식구들은 가족처럼 한마음으로 완벽하게 뭉쳤다. 나는 서울대학교 병원에 근무하면서 신영병원의 환자를 돌보기로 했다.
병원은 2층까지만 완성한 상태에서 자금이 모자라 3층은 골조공사만 하고 내부 공사를 끝내지 못한 채, 개원을 눈앞에 두고 첫 환자를 받았다. 그때가 19666년 6월 20일이었다. 정식 개업을 하기도 전에 첫 번째 수술환자가 들어온 것이다.
환자는 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상공부 차관의 부친 김교철 씨였다. 이 분은 그 당시 70대 중반이었는데, 은퇴하기 전에 조흥은행장을 지냈던 분이다. 나는 당뇨가 심한 70대 환자를 겁 없이 수술대에 올려놓고 수술을 감행했다.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된 상황에서 수술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술실 조명 등을 국산으로 구입한 것이 문제였다. 수술을 시작한 지; 20분 만에 조명등이 꺼지고 만 것이다. 밖에서는 환자의 보호자들이 다 보고 있는 상태였고, 이미 수술은 시작했으니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이 몇 개의 손전등을 켜준 상황에서 차분히 수술을 마쳤다. 수술을 마친 나는 그날로 일제 조명등을 구입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1966년 6월 23일, 병상 열세 개를 갖춰놓고 드디어 개원을 했다. 개원하는 날, 오후에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축하객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병원이 화환으로 꽉 들어차는 축복 속에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미 첫 번째로 수술한 김교철 씨는 차도를 보였고, 그 뒤를 이은 환자들이 입원실마다 가득 찼다. 나는 D토건에 가서 사정을 했다.
“우리 병원에 와 보세요. 병상 열세개로 돈을 갚는 게 빠르겠어요? 아니면 스물다섯 개로 갚는 게 더 빠르겠어요?”
선금을 내라는 건설회사를 달래 나머지 3층마저 완공했다. 한 달만에 뚝딱 완성시킨 것이다. 나는 우선 숨을 돌린 다음, 환자의 회전율을 높이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환자를 치료하는데 전념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병원 땅을 담보로 돈을 빌린 무역회사가 부도나면서, 회사의 임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세금도 없이 사들여온 원료를 국내에 비싼 값에 팔고, 수출하는 물건을 엉터리로 만들다가 감독당국에 들통이 난 것이었다.
이제 그 여파가 우리에게로 왔다. 조흥은행으로부터 차압이 들어와, 연대 담보로 되어 있는 신영병원에까지 차압딱지가 달라붙었고, 재정적 압박이 서서히 병원을 죄어왔다. 졸지에 나는 병원을 담보로 돈을 빌린 회사의 부채까지 떠안게 된 것이었다. 나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매부가 수소문한 끝에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신영병원의 땅뿐만 아니라 상도동의 1만5천 평의 땅이 부도난 회사의 담보로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매부는 그 땅을 내 앞으로 명의 변경 해놓으면 당장 현금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빛을 갚는데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귀 뜸을 해주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7시에 신영병원에 출근해서 8시 30분까지 한두 건의 수술을 마쳤고, 곧바로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동해 수술과 강의를 병행해나갔다. 4시쯤 퇴근하고 나면 다시 신영병원으로 돌아와 8시나 9시까지 시술을 했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11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쁜 척 한들 내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저절로 풀릴 리는 없었다. 하루에도 수차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나는 빚 갚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자연히 서울대학교 병원을 등한시 하고 신영병원에 집중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