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문호 원장은 1990년 3월 1일부로 의료원장으로 옮겨가고, 내가 2대 병원장으로 취임했다.
병원장이 되자 부원장을 천거하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교육간호 부원장에 김기용 선생, 진료부원장에 서병태 선생, 이렇게 두 사람을 추천했고, 그대로 임명되었다. 한편 연구소가 정식 개원하기도 전에 병원장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홍창기 내과 과장에게 연구소의 부원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담배 한 갑을 피워가면서 회의에, 병원 경영에 온 정성을 쏟았다. 무엇보다 붙박이로 일하는 성실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정 회장의 경영스타일이었다. 정 회장은 일단 자리를 맡겨 놓으면, 처음 얼마간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을 중시하고 뒷 조사를 하는 등 철저하게 검증하는 타입 같았다.
정 회장은 사람을 판단할 때, 거짓말을 하는가, 열심히 일하는가, 능력이 있는가, 이 세 가지를 순차적으로 집중 파악한 뒤, 그 사람을 믿고 완전히 맡길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듯했다.
내 경우가 그랬다.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시내에서 식사자리를 마련한 정 회장은 현대그룹 간부들과 나를 앉혀놓고 지시를 내렸다.
“병원에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다들 민 원장을 도와줘라.”
정 회장으로부터 그 지시가 떨어진 뒤로는 안 되는 게 없었다. 채용이나 병원 부대시설에 대한 이권에 개입하지 말라는 뜻도 있었다. 병원의 인사, 장비구입, 예산편성, 심지어는 기숙사 건축까지도 내가 원하는 대로 추진할 수 있었다.
내가 병원 내부적으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유능한 의사들이 자기 간판만 내세우게 두지 않고 진짜 자기 실력을 발휘하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또한 관리직 쪽에는 지나친 의욕과 주인의식을 앞세워 의사들에게 간섭하려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의사가 전투군인이라고 한다면, 관리직은 전쟁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의사들에게 제공하고 제대로 된 환경을 조성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병참담당이라고 할 수 있다. 직원들 누구라도 무언가를 요구하면 다 들어주었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원장에게 직접 와서 말하라고 일렀다.
그러면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의사들과 식사와 술을 함께 하고 골프를 치면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관리직 쪽에서는 몇몇 임상과가 심한 적자를 내고 있으니, 없애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마치 일반 기업의 만성적자 부서를 정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생각인 것이다.
“우리 같은 큰 종합병원에서는 갖춰야 할 과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소리 마세요.”
나는 그렇게 잘라 말했다.
나는 의사들에게 돈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았다. 의사이면서 교수인 그들은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나는 각 임상과 과장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지시켜주었다.
“과장의 업적은 과의 전체 공적을 총괄하는 것이지, 과장 개인이 얼마나 많은 수술환자를 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 개인이 적게 시술했을지라도, 과 전체 의사들이 어떻게 업적을 냈느냐에 따라 과장의 업적도 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그러니 과원들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만들어주세요.”
다행히 과장들은 원장의 말을 잘 알아듣고 따라주었다.
초창기에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부족한 레지던트 문제였다. 개원한 첫 해는 다른 병원에서 파견 지원을 받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그 후에 새로 선발한 레지던트들이 상급 년차로 승급하면서 차차 레지던트 문제는 해결되어 갔지만, 완전히 그 문제가 해결되기 까지는 개원 이래 4년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근무한 의사들은 좋은 병원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와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밤 9시, 10시에 퇴근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덕분에 천 개의 병상을 다 열었는데도, 금세 병상이 꽉 차 입원 대기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환자가 늘어나자, 나는 더 많은 전문의들을 국내외에서 충원했다.
눈꼴시고 아니꼬워 야단났다
사람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문제가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고대 구로병원에서는 고대 출신과 서울대 출신의 갈등이 있었지만, 서울중앙병원에서는 국내파 의사들과 해외파의사들 간의 갈등이 있었다.
또 의사와 간호사들 간에도 알력이 있었다. 서울대 출신의 간호사들과 다른 대학 출신의 인턴, 레지던트 간에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콧대 높은 간호사들은 자기들끼리를 선생님으로 호칭하면서 행여 누군가가 자신들을 간호원(간호사 이전의 호칭)이라고 부르면 난리가 났다.
의사는 간호사를, 간호사는 의사를, 서로가 서로에게 눈꼴시고 아니꼬워 야단을 떨어댔으니, 병원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하루는 레지던트가 간호사와 말다툼을 벌이던 중에 그만 간호사의 따귀를 때리는 바람에 병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나는 그 문제의 의사를 따로 불러냈다.
원장의 중재로 마지못해 사과하는 의사와 건방지다고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간호사, 서로 협력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반목하고 견제하고 있으니, 그들 스스로가 병원 생활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