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단 하나 살아있는 전화선으로 현대건설 이명박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병원내부에서 밖으로 전화를 걸기도 바빴기 때문에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날이 저문 후에야 통화가 되었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병원 상황이 어떻습니까?”
“입원한 환자가 천여 명에다가 보호자, 외래환자, 내방객, 그리고 우리 직원들을 합치면 대략 오천 명 정도가 이 병원에 갇혀 있습니다.”
“이 통화를 하려고 한 시간 반 동안 신호를 기다리다 겨우 통화가 됐어요. 다시 통화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필요한 것을 다 말씀해주세요.”
“전기와 식수, 환자들의 식사가 제일 급합니다.”
통화를 마치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한 밤중에 병원 밖 사람들은 도시락을 물 위에 둥둥 띄워서 우리 쪽에 전달했다. 전기, 물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화장실마다 오물이 넘쳐 흘렀고, 계단에 신문지를 깔고 볼일을 보는 일이 생겨났으니 병원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보호자들 간의 험악한 언성이 서로의 귓불을 후려치다가 이내 상황실을 향한 원성으로 돌변하여 우리의 귓속으로 돌진했다. 보호자들의 갖은 욕설 앞에서 내 곁에 있던 간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민망해했다. 나는 인내심으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촛불이나 손전등을 켜 놓은 채 김밥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나 역시 점심부터 굶었던 지라 이 상황에서도 김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나는 홍창기 선생과 함께 중환자실을 돌았다. 수련의들과 간호사들이 삼삼오오 어둠속에서 촛불을 켠 채 서로를 격려하면서 수동식 인공호흡기로 환자들의 호흡을 열심히 돕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찌검도 서슴지 않으며 대립하던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이 아니었던가. 함께 라면을 끓여먹은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다. 위기 속에서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가 된 그들의 화목한 모습에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현대건설을 이르러 불도저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딱 맞는 표현이었다. 밤새 빗속을 뚫고 긴급 가설작업을 한 그들 덕분에 자정 무렵부터 올림픽대로 상의 발전기가 가동되어 병원에도 불이 들어왔다. 환한 불빛이 병원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을 무렵 병원에 물과 도시락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접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별의별 목격담들이 귀에 들어왔다.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어떤 남자가 얘기하던 주차장의 여인은 대체 어찌 되었을까. 물이 빠지고 나면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는지 나는 심히 염려스러웠다.
새벽이 되면서 병원은 다소 조용해졌다. 꼬박 밤을 새우며 심사숙고한 끝에, 새벽 6시쯤 대책회의를 열고 이내 최종 결정을 내렸다.
“환자 전원을 후송조치 합시다!”
대부분의 간부급 직원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관리과 직원들에게는 구명보트를 확보하도록 지시했고, 기획실장에게는 서울시 등 관계 기관에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섬처럼 변해버린 병원건물로부터 환자들을 이송할 수 있도록, 모든 운반수단과 앰블런스, 119구급대까지 총동원시키도록 조처했다. 상황실의 간부급 직원들은 제각기 할당된 임무수행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때부터 나는 지시한대로 일이 진행되는지를 보고받는데 주력했다.
병원 뒤편 올림픽대로에는 각 병원에서 보내온 들것들이 도착해 있었고, 서울시에 있는 앰블런스 3분의 2에 해당하는 120여대가 올림픽대로 위에 쭉 늘어서 있었다.
‘환자들을 후송할 준비는 다 되었다. 이제 중환자실과 입원실 환자들을 어떻게 병원 밖으로 안전하게 인송할 것인가가 문제다. 구명보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각과의 환자를 편의상, 집에서 요양치료를 해도 좋을 환자, 다른 병원에서 통원치료을 받아야 할 환자, 인공호흡기를 떼면 그 즉시 생명이 위급한 중환자로 나누어서 상황실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 세 갈래로 분류한 환자들을 인원에 맞게 서울 시내의각 병원에 배정했고, 각 환자마다 병명과 성명, 그리고 지금까지 받았던 치료내역을 요악한 마크를 앞가슴에 달아주도록 했다.
영동 세브란스병원 10명, 경희대부속병원 10명, 한양대부속병원 15명, 국립의료원 10명, 강남병원 20명, 순천향병원 10명, 여의도성모병원 10명........... 우리는 우리의 환자들을 각 병원에 무조건 부탁했던 것이다.
물 건너 뚝 위에 앰블런스가 있는 데까지 환자를 이송할 방법을 찾으려고 골몰하던 참에 특전사 권명원 장군이 참모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명신 총무과장이 특전사를 동원하여 환자 수송을 하고자 여기저기 접촉을 시도하였는데, 그것이 비호부대의 권명원 장군을 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러잖아도 민간인들을 위한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는데, 이명신 과장이 다급한 마음에 자신이 예전에 근무했던 국방부 선배들에게 구조지원을 부탁한 것이 권 장군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권 장군은 부대원들을 데리고 민간인을 돕겠다고 완강하게 고집했다. 요지인즉, 인근 주민들이 지붕 위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데, 병원에만 모두가 매달린다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권 장군은 금세라도 부대원을 이끌고 병원을 나설 기세였다. 모든 정황을 이해한 나는 권 장군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갈 때 가시더라도 저와 함께 잠깐만 들러주시지요.”
권 장군을 안내한 곳은 중환자실이었다. 원래 중환자실에 들어가려면 신발까지 소독한 것으로 갈아 신고 들어가야 했지만, 상황이 상환인지라 군화를 신은 장군에게 그것까지 요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무조건 내과계 중환자실로 권 장군을 이끌었다.
중환자실에서는 병상에 누워 고통을 비명으로 토해내는 환자들 곁에서 수동식 인공호흡기를 다루다가 기진맥진한 간호사들이, 꾀죄죄한 가운은 입고 동분서주하는 의사들이 애써 불안함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권 장군의 안색이 변했다.
나는 권 장군을 놓치면 이 모든 환자들을 놓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을 그에게 직접 보여주며 통사정을 했던 것이다.
권 장군은 앙상한 뼈만 남아있는 노인의 몸에 가느다란 호스가 몇 겹으로 달린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발가벗은 갓난아기의 콧속에 박힌 가는 호스를 발견하고는, 숨 쉴 때마다 그 볼록한 배가 팔딱거리는 모습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쓰다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