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서 공부가 안돼 (4화)
  제1장 소년의 꿈은 인생으로

경기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친척집에서 나와 계동의 하숙집으로 옮겨갔다. 그때 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과 같은 방을 사용했다. 옆방에는 치과전문학교 학생과 집주인의 아들이 함께 지냈다. 나와 같은 학년인 집주인 아들은 보성중학교를 다녔다. 내 룸메이트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비해 ‘치전생(齒專生)’은 공부를 등한시 하며 담배나 피우고 극장에 다니는 데만 열중했다.

때는 일제 말기라, 식량이 모자라서 엄격한 배급제가 실시되고 있었다. 국민 1인당 하루 2홉 3작의 쌀이 배급되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는 한 달에 세 되가 추가로 배급되었다. 그 배급표를 하숙집에 갖다 주었지만, 하숙집에서는 매번 밥을 야박하게 주어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어떤 날은 학교에 등교하기가 무섭게 도시락을 꺼내 아침에 다 먹어버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혼자 밖에 나와 수돗물을 마셔가며 혼자 허기를 달랬다.

그만큼 배가 고팠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서울 아이들은 좋은 반찬으로 점심을 먹는데 반해, 내 반찬은 예외 없이 무말랭이 무침 한 가지였다. 그래도 밥이 좀 많았으면 하는 생각은 했을지언정 반찬 투정을 한 적은 없었다. 공부를 하는데 허기가 져서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잡념이 많아진 게 문제였다.

▲ 경기중학교 시절

하교하고 하숙집에 들어오면 배가 고파서 언제 저녁상이 나오는지 보려고, 문창호지를 손가락으로 뚫어 부엌 쪽을 엿보기 일쑤였다. 그렇게 ‘언제나 밥상이 나오는가’ 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밥상이 나오면 총알같이 튀어나가 밥을 먹었다. 좀체 배가 든든한 정도의 만족감은 느낄 수가 없었다.
 
언제나 허기를 채우지 못하고 허전함을 안고 있을 때, 치전생이 다가와 밖에 나가자고 손짓하면 난 망설이지 않고 따라 나섰다.

치전생은 저녁때만 되면 호기심 강한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당시에는 중학생이 극장에 갔다가 들키면 정학을 받았는데, 그래도 수시로 치전생과 함께 극장에 출입했다. 가끔은 담배 심부름도 해주었다. 당시는 담배를 한 사람에게 하루 한 갑만 파는 배급제였다.
 
아침 일곱 시에 담배 가게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주인이 문을 열면 치전생 뒤에 서서 담배를 사주곤 했다. 물론 치전생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심부름이었다. 하루는 담배 가게 아저씨가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며 물었다.

“넌 어른이 아니잖아?”
“아버지 심부름 왔어요.”
 
▲ 진주중 시절 친구들과 / 뒷줄 오른쪽이 필자다

그러면 담배를 내주곤 했다. 나는 담배를 사들고 가게를 나와 저만치 골목에 서있던 치전생에게 담뱃갑을 전해 주었다. 그는 내게도 담배 한 개비를 내밀곤 했다. 처음에는 중학생이 이래도 되는 걸까 하며 망설였지만 ‘한 번만 피워보자.’는 심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동동주도 함께 마셨다.
 
자연히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배가 고파서 공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1, 2학년 때는 성적이 꽤 좋았는데, 4학년이 되자 저 뒷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치전생을 따라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불량학생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고민이 되었다. 집에서 부쳐주는 하숙비와 생활비를 생각할 때마다, 일말의 양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가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어야 할텐데......’

어린 마음에도 앞날을 위해 지금 같은 생활에서 발을 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근로봉사에 나서게 했다. 김포공항을 건설하는 현장에 나갔고, 인천 병기장에서도 일했다. 신문과 라디오는 일본의 전세가 불리하다는 뉴스를 내보냈고, 정기적으로 미군의 정찰비행기가 서울상공을 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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