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치프 (25화)

마침내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1년 위의 치프 레지던트가 유학 차 영국으로 떠나면서 그 자리에 공석이 생긴 것이다. 교육위원장이 나를 불러 말했다.

“닥터 민, 당신을 치프 레지던트로 승격시키겠소.”

“정말입니까?”
“정말이지.”
“고맙습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3년 6개월 만에 드디어 치프로 승진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사랑스런 아이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가장의 유학으로 인해 고생하는 아내에게 그날 밤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치프로 선발된 데에는 피츠버그에서 성실하게 수련의 과정을 밟은 것과 밀러 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이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인조차도 따기 어려운 치프에 발탁된 것은 나에게 엄청난 영광이요, 행운이었다.

외과에서는 치프가 왕이다. 치프의 권한은 외과에서만큼은 무한대다. 일단 하급 레지던트와 인턴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고, 외과 전체를 조종해야 하는 책임도 부여받게 된다.

무엇보다도 치프는 수술실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미완성 차트를 완료하도록 지시하고, 수술일정과 수술실 배정에 관한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는다. 또 식당에서 우선적인 대우를 받고 기숙사에서도 큰 방을 배정받는다.

그뿐인가. 인턴과 레지던트의 진급 심사에 결정적인 조언을 하기 때문에 치프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면 아래 연차의 레지던트들이 긴장해서 도중에 슬쩍 꽁무니를 뺄 정도다. 내가 레지던트일 때도 치프를 발견하면 그랬던 기억이 솔직히 몇 번 있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딕터폰(Dictaphone)에 수술기록, 입퇴원기록 등을 구술하여 녹음한 뒤 의무기록실에서 문서화하여 최종적으로 담당의사가 서명하는 제도가 있다. 그런데 미완성 의무기록 차트와 환자 병력기록 차트, 환자입퇴원기록 차트 등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경우, 예컨대 레지던트 한 명당 밀린 차트가 20개 이상이 되면 가차 없이 주의를 주는 일도 마땅히 치프가 해야 할 임무다.

“너는 새 환자를 받지 말고 수술실에도 들어오지 마라. 의무기록 차트 정리나 잘 하고 있어.”

그러면 레지던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싹싹 빈다.

“밤새워 할 테니까 제발 수술실에는 들어가게 해주세요.”
“그래? 일단 수술실에 들어가되 오늘 중에는 끝내야 한다.”

▲ 미 유학 시, 치프레지던트 시절

그러나 이튿날에도 약속을 안 지키면 혼쭐을 낼 수밖에 없다. 정말로 환자도 받지 못하게 하고 수술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본보기로 한 사람을 옥죄면 그 소문이 병원 내에 순식간에 퍼지면서 자연스레 기강이 잡힌다. 풀어줄 때 풀어주고 엄할 때 엄해야 하는 운영의, 묘가 치프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치프로 있을 때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 일이 있다. 닥터 마호니라는 친구가 소아외과에서 순환근무를 할 때였다. 사경을 헤메던 아이가 잠자고 있던 것을 확인한 마호니는 간호사에게 환자를 맡긴 채 숙소로 들어갔다. 밤중에 간호사는 아이에게 이상이 생긴 것을 보고 마호니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환자가 이상해요. 호흡도 심장박동도 없어요. 꼼짝을 안 해요!”

미국에서는 간호사가 환자의 생사에 대한 발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더구나 죽었다는 말은 절대 금지였다. 잠에 취한 마호니는 간호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괜찮을 거예요. 잘 돌봐주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해요.”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다. 당황한 간호사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불통이었다. 잠결에 수화기를 잘못 놓았을 거라는 판단이 서자, 간호사는 경비를 불러 마호니를 깨우게 했다. 경비원이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호니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호니가 졸린 눈을 비비며 환자에게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처구니 없고도 절망적인 사건은 내가 치프로 있는 동안 벌어진 유일한 큰 사고였다.

병원 안에서 사람들은 나를 ‘출’이라고 불렀다.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해 닥터민이라는 호칭 대신 내 이름의 마지막자 ‘철’을 영어식으로 발음하여 부른 것이다. 교수들은 출에게 일을 맡기면 모든 것이 “슈어Sure”라며 직원들 앞에서 나를 칭찬해주었다.

그렇듯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하기에 미국에서 치프의 권한은 실로 대단했다. 나는 치프라는 이유로 병원의 교수 전용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교수들은 환자의 수술에 대한 견해를 나누다가 결국은 내 생각을 묻곤 했다.

“출의 생각은 어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생각을 말했다. 의견을 피력한 뒤에 보면 모든 수술계획은 내가 말한 대로 잡혀 있었다. 나는 치프로서 수술실 번호, 시간, 조수들까지도 지정해줘야 했다. 미국인들이 한국출신인 내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많은 감회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