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배짱
그즈음, 내가 유일하게 위안을 받는 곳은 의과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머리 좋은 학생들과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은 내 영혼을 맑게 정화시켜주었다. 학생들이 잘 따라주었기에 나는 절로 강의에 흥이 났고, 그래서 강의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보통 강의안을 준비할 때, 나는 원고를 만들어 암기했다. 그리고 제목을 정하고 몇 개로 나눈 다음, 강의하는 날에는 화장실에서도 암기했다. 45분짜리 강의안 준비를 위해 무려 다섯 시간 씩을 할애했다. 수술하고, 술 먹고, 친구들 만나 놀고 떠들면서도 밤을 새울지언정 강의안은 반드시 꼼꼼하게 암기하여 철저히 준비했다.
좋은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이 준비 이상의 대안은 없다. 경기중학교 1학년 때 생물학 선생의 강의를 떠올리며, 강의를 할 때는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이끌었다. 악센트를 줘 가면서, 중요한 요점 한두 개만 강조했다.
그렇게 내 의사를 명확하게 주르륵 엮어가면서, 학생들과 눈빛을 마주한 채 강연하면 한 사람도 졸지 않는다. 강연이나, 수술, 강의에 앞서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수없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수술에 임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의사들 사이에는 VIP 환자 신드롬이라는 것이 있다. 특별히 잘 봐주려는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면 보통 때 하지 않던 짓을 하게 되고, 그러면 덧나는 수가 많은 법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무대배짱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무대를 준비하는 단 아래보다는 무대에 섰을 때 배짱이 두둑해진다. 수많은 연습 끝에 무대에 오르면 펄펄 날아갈 듯이 무대를 제압하는 특유의 배짱은 수술실에서나 강의실에서 요긴하게 활용된다. 환자의 수술도, 가르치는 학생들도 의사와 선생하기 나름인 것이다.
기본기에 충실하면 누구라도 무대에서 강해질 수 있다. 집담회나 1년에 한두 번 열리는 외과학회에 참석할 때도 나는 사전에 하는 준비를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소문을 들은 다른 대학의 의과 대학생들이 내 강의시간에 도강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료교수들은 나의 면전에다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당신은 선천적으로 말을 잘 하니까 그렇지 뭐.”
“그래, 맞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저 웃어넘겼으나 속으로는 이렇게 되뇌었다.
‘빌어먹을. 내가 얼마나 노력한 줄 알기나 해? 이젠 교수법까지 질투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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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의대 교수시절 / 뒷줄 오른쪽이 필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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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군 수송선
1963년, 그해 10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미국 외과학회(ACS)로부터 정회원이 되었으니,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느덧 귀국한지 3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한 가지 고민이 되었다. 외과의사로서, 교수로서 유명세는 높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은 말이 아니었다. 당장 비행기표를 구할 돈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때마침 미네소타에서 파견된 미국인 교수 닐 골트(Neal Gault)박사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혹시 시간이 나거든 뉴욕에 있는 차이나 메디컬 보드 재단의 본부를 찾아가 보게. 도움이 될 거야. 아시아계의 유능한 의사들에게 관심이 많은 곳이거든.”
나는 콜드 박사의 도움을 받아 미 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 군용선에 무료로 승선할 기회를 얻었다. 이 군용선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정기적으로 미국에 수송하고 있었다. 미국에 갈 길이 열리자 비로소 나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좀 더 발전될 의술을 배워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순히 대관식만 참석하고 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자비로 3개월 동안 미국연수를 다녀오겠다는 명분 아래 병원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나는 허가를 고맙게 생각하여 곧 출국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인천에서 1만 톤급 군 수송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까지 가게 되었다. 이 배는 병사 클래스와 장교 클래스로 나뉘어 있었는데, 나는 수면 아래 선창가 방의 병사 클래스 2층 침대를 배정받았다.
나 외에 한국인 학생 3명이 더 있었다. 우리는 식사 때마다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갑판에 올라가지 못했다. 사내들끼리 보름간 선창에 갇혀 있으면서, 나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불쾌했다. 병사들은 사내들끼리 벌거숭이로 오가는 게 대수냐는 식이었고, 수염을 깎는 사람도 드물었고, 상소리와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목욕도 제대로 하지 않아 메스껍고 불쾌한 땀 냄새가 나는데다 파도가 심해 뱃멀미까지 하느라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행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문명을 위해서는 여자가 있어야겠구나. 그래야 이런 상스러운 광경도 사라질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새삼스럼게 조물주의 섭리를 깨달았다.
배는 인천을 떠나 일본 요고스가에 하루를 머물고 알류산 열도를 거슬러 올라가서 에이다크 섬에서 하루를 쉰 다음, 알래스카의 서쪽 연안을 남하해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얼마나 뱃멀미가 심했던지, 배에서 내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걸어가는데도 어지러웠다.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어지럼증과 뱃멀미가 사라졌다.
1963년 당시, 미국 외과학회의 정회원(펠로우, Fellow)으로 참석한 한국 사람이 또 누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