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은행은 나를 압박하는 수준에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일방적으로 병원을 경매하겠다는 공시를 신문에 내버렸다. 사람들이 와서 병원을 둘러보자 덜컥 겁이 났다. 이때 좋은 충고를 해준 사람이 있었다. 몇 년 전 버거씨 병 환자로 들어와 하지절단 수술을 받았던, 상업은행의 이사였다.
그는 내가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위로도 할 겸 술을 사겠다고 나서겠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전 이사는 나를 도와주고 싶다며,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물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은행에서 합류한 그 회사 소유부동산 중에서 상도동 땅만 5천 평의 시세가 아주 유명하니까, 은행에 인수된 가격에 다시 사서 원장님 명의로 인수하세요. 나중에 시세가 폭등할 때 팔면 지금 떠안고 있는 빚은 거의 갚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나는 좀 더 자세히 물어보았다.
“은행에서 담보하고 있는 물건을 분리해서 떠안고 변제하는 대위 변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경매분리 신청을 하는 것이죠. 은행에서 허락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한번 뚫어보세요.”
은행에서 그 땅을 인수한 가격으로, 내가 은행으로부터 다시 사는 방법은 난공불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은행에 찾아가 당시 관리부장에게 통사정을 했다.
“내 권한 밖이라 딱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매정하게 딱 잡아뗐다. 이번에 상무를 찾아갔다.
“그런 특혜를 어떻게 드립니까? 안됩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병원이 통째로 넘어가게 될 판국이었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조흥은행 문종권 은행장의 아들이 당시 서울대학교 의대 이비인후과 문일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문일영은 나보다 5년 후배였다. 나는 당장 문일영을 찾아갔다.
“오랫만입니다.”
반갑게 선배를 맞이하는 그에게 나는 다짜고짜 아쉬운 소리를 하고 말았다.
“나로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으로 자네를 찾아왔어. 좀 도와줘.”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은행장이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나는 살아날 길이 없다고 말했다. 문일영은 한참 만에 말문을 열더니,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했다.
“두 분이 만날 수 있도록 제가 주선은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야기가 길어지면 싫어해요. 요점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고마워.”
“아직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요, 뭘.”
은행장을 면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불씨를 살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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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는 신영병원을 개업했어도 서울대의대 교수직은 유지하고 있었다 /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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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은행장과 함께 은행장실을 찾아갔다. 나는 은행장 앞에 선 채 말 그대로 브리핑을 하려고 했다.
“신영병원 일 때문에 온 민병철입니다. 저는......”
“알아, 알아.”
듣던 대로 문 은행장은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타입인 듯 했다. 나는 얼른 본론을 말했다.
“상도동 땅을 은행에서 실손(實損) 없는 가격으로 주신다면, 제가 이 은행 빚을 다 짊어지고도 살아날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은행장은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봐. 관리부장에게 가서 내가 보내서 왔다고 그래.”
아버지가 아들 일영의 체면을 봐서 허락한 것이었다. 나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으로 관리부장에게 달려갔다. 그는 마침 은행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나는 은행으로부터 상도동의 땅을 되살 수 있었다. 명의이전은 신영병원 앞으로 했다. 그로 인해 나의 문제는 무역회사 덕분에 신영병원이 떠안은 4천5백에다가, 상도동의 땅값 1천 2백을 합쳐 5천7백만 원으로 불어났다. 40년 전의 이야기이니 지금 돈으로는 50억이 훨씬 넘으리라 본다.
나는 용기를 내어 담보로 떠안게 된 부채와 이자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1966년 당시만 해도 은행금리가 26%일 때, 연체가 되면 36.5%로 늘어날 때였다. 매일매일 갚아나가기도 역부족이었다. 원금은 갚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은행이자만 130만원씩 갚아 나가야 했다.
맹장 환자 한사람의 입원비, 퇴원비, 수술비를 포함한 치료비 일체가 10만원이던 시절이었으니, 어느 세월에 무슨 수로 그 많은 돈을 더 갚는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주일단위로 나누어서 이자를 꼬박꼬박 갚아나갔다. 이자가 없다는 말에 솔깃해서 병원 땅을 담보로 천만원을 빌렸던 나는 이자를 갚을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이 돈을 다 못 갚느니 차라리 죽어버릴까? 아니야, 미국으로 도망가 버리자. 이게 무슨 생각이냐. 민병철 답지 못하다. 정정당당하게 이겨야지.”
그런 생활을 하게 된지 2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서울시에서 상도동 땅을 팔라는 요청이 왔다. 학교를 지을 부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땅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형편없는 가격으로 매입하겠다는 조건을 내놓았다 .나는 여기저기 조언을 구한 결과 서울시의 제안을 일단 거절했다. 그러자 상대편에서 정색을 하고 재차 불렀다.
“얼마면 팔겠습니까?”
“사천만원.”
“.......”
꿀 먹은 벙어리가 될 만도 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을 제시한 것이었으니까. 일주일이 지난 뒤 서울시에서 연락이 왔다 .
“이전 수속을 준비해서 돈을 받아가세요.”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사무장을 시청에 보냈더니, 정말 4천만 원짜리 수표를 가져왔다. 나는 그 돈을 받은 즉시 조흥은행에 가져다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기쁨을 만끽하며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5천7백만 원의 빚이 1천7백만 원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제 이 정도 빚은 코끼리 비스킷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후 이삼 년 안에 빚을 다 갚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살아생전 그토록 뜨거운 감자에 데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사건을 해결한 후로는 내 평생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보증은 서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