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속 구로병원장에 발탁 (41...

신영병원에 6년째 전념한 결과, 어느 정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적용된 의료보험 수가가 비현실적이어서 이 제도가 보편화되었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보험환자가 왔으나, 1981년과 그 이듬해인 1982년에는 점점 보험환자가 늘어서 병원 운영에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이때, 당시 준공단계에 있었던 고대 부속 구로병원에서 외과 과장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즈음 가끔 만나오던 LG그룹 구자경 회장과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와중이었다.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고대 구로병원에서 나를 오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고대 재단 이사였던 구 회장이 눈을 크게 뜨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왕 가려면 병원장으로 가야지!”

구 회장이 개입되면서, 그때까지 병원장 물망에 올랐던 주정화 교수 대신 결국 내가 고대구로병원장과 외과 과장을 겸직으로 맡게 되었다. 주 선생은 여러 해전 나의 쇄골부 수술 집도의였기 때문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지만, 얼마 후 고대 혜화병원장의 보직을 받아 그나마 미안한 마음을 덜 수 있었다.

내가 고대 구로병원장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나자, 신영병원에서 나와 고락을 함께 해온 직원 30명의 앞날이 고민되기 시작했다. 고대 의무행정처장에게 내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고대 구로병원에서 다 껴안겠다”라고 했고, 나는 신영병원에서 함께 가겠다고 한 20여명을 구로병원에 데려오면서 고민을 덜게 되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1983년 3월 1일, 나는 신설 병원의 병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구로병원은 골조를 끝내고 내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때부터 실제적인 공사에 관여하게 된 나는 개원준비를 서두르면서, 당시 고려중앙학원 재단의 김상만 이사장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김 이사장은 고대와 연대 간의 경쟁관계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고대 법대와 연대 상대 등은 호각지세를 이루며 커왔는데, 왜 의과대학 하면 연대가 당연히 우위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하소연을 했다.

“나의 맺힌 한을 좀 풀어주시오. 새롭게 짓는 구로병원만큼은 최소한 연대 정도는 따라가게 해야지요.”

“의대의 경쟁력은 결국 의사와 의료장비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의료장비 문제라면 얼마든지 밀어드리지요. 또한 의사는 굳이 고대 동문이 아니어도 좋아요. 연대 의과대학만 능가하는 수준으로 올려준다면, 인사권은 원장 마음대로 행사해도 됩니다.”

나는 김 이사장의 간곡한 당부를 듣고 병원을 일류 수준으로 올리는 것에 온 신경을 쏟았다. 이윽고 병원 의무차장과 협의했다.

“서울대 의과대학에 있는 현직 교수는 우리 병원에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직접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실력 있는 의사를 영입해오겠어요.”

▲ 신영병원 시절 직원들과의 회식

그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한테 시간만 내주면 돼요. 여행경비는 내 돈을 사용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신설 병원장으로 내정되어 3주동안 외유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우수한 인재를 영입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나는 미국과 유럽을 돌면서 현지에서 유능한 의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기억나는 사람 중에 성형외과 박세민 박사가 있었다. 1980년 대 중반, 백세민 박사는 성형외과 분야에서 재건성형수술의 대가로 소문난 의사였다. 특히 악안면수술에 정평이 나있는 그를 위해 수술장비 지원에 전폭적인 배려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밖에 재활의학의 강성관 교수, 소아심장의 이규완 교수, 혈관외과의 김창호 교수가 있었다.

모두가 실력 있는 의사들이었지만 한결 같이 살 집이 없음을 호소했다. 나는 다시 김상만 이사장을 찾아가 유능한 의사들이 서울에서 살 집이 없다하니, 병원에서 2~3년간 전세를 얻어줄 방안을 건의했다. 그들이 집을 구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2억으로 다섯 명 모두가 각자 여의도에 45평 아파트를 전세 4천만 원에 입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사실은 당사자들 외에는 비밀에 부쳐 일에 함구령을 내렸다.

기초가 튼튼해야 병원이 잘된다는 생각에, 병원의 기초가 되는 실력있 는 의사를 구하다보니 서울대 출신이 많았다. 일부러 서울대 의사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자리에 접합한 의사들을 찾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주니어 스태프 등은 모두 고대출신이었다. 내 마음 속엔 그들이 10년 뒤면 모두 크게 자라 교체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과장급은 서울대 출신이 태반이었고, 젊은 스태프는 고려대 출신이 대부분인 인력구조로 구성되었다.

개원일이 가까워지면서 새로 구성된 의료진의 명단이 공표되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발칵 뒤집어졌다.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고려대 의과대학이 받은 충격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아니, 여기가 서울대학교병원인가?”

아주 노골적인 불평불만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라 그대로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구로병원의 공식 개원일은 1983년 9월 1일이었다. 아침 출근길에 소련 비행기의 KAL007기 격추 소식이 귓가를 후려쳤다. 뉴욕에서 서울로 오던 KAL007기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서 격추되었다는 뉴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