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의 사명은 진료, 교육, 연구다. 옛날 서울대 의대에서 내가 연구하려던 것은 실패로 돌아갔고, 논문은 많이 쓰긴 했지만 전부 임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기초연구 논문이 없었기에 나는 그동안 연구에 대한 갈망이 컸다. 늦게나마 기초연구를 해볼 요량으로 잠자리에 누워서도 무슨 연구를 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서울중앙병원의 정식 개원은 1989년 6월이었다. 외과는 김석구, 박건춘, 김인규, 이승규, 김진천과 나로 이뤄진 여섯 명의 스태프와 펠로우로 임명된 안세현 선생이 뭉쳐 시작했다. 지금은 의사가 25명쯤 되고 펠로우도 여러 명 있다.
병원을 개원할 당시에 연구소는 아직 골조공사 중이었는데, 지하 2층에 지상 5층짜리 건물이었다. 나는 평소 ‘제대로 연구 한 번 해봤으면 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연구에 온 열정을 다 바치기로 결심했다.
연구소는 병원 개원보다 1년 늦게 개소되었다. 당장 내가 할 일은 연구소의 세부적인 설계였다. 그러나 뭐 아는 게 있어야지.......
해외에서 다양한 연구 경험을 쌓은 교수진 10여명으로 구성된 연구소 개소 준비 팀을 이끌고 실제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연구소의 기본 설계는 미국의 듀퐁연구소를 모델로 하되, 의학연구소의 기능에 맞게 보완하였다.
날 많이 도와준 이정신 선생, 문희범 선생, 이기업 선생, 이 세 사람과 함께 전국의 연구소를 탐방하러 다녔다.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규모와 설비가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담하게 설계도면을 그려서 정주영 회장에게 결제를 받아냈다.
병원은 개원당시 우선 병상이 300개정도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다들 정신없이 바빴다.
나는 구로병원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조금은 앞을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참 건축 중인 연구소에 신경을 써야했고, 또한 과장으로서 외과에도 열중해야 하는 터라 병원 전체의 동향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병원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정 회장이 나를 호출했다. 계동 회장실에 들어서는데, 정 회장이 다짜고짜 말했다.
“당신이 병원장을 맡아.”
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아, 원장님이 계시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뜨악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 회장은 잠자코 침묵하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일 다시 들어와.”
다음날은 병원 이야기는 하지 않고 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향후 연구소의 발전계획과 오개년 계획을 짜서 다시 들어와.”
나는 세 명의 연구원들과 밤을 세워가며 작성해서 다시 들어갔다. 사흘 연속이었다. 정 회장은 작성한 계획서를 한번 훑어보았다.
“됐다. 그대로 해.”
그러더니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당장 부원장부터 해.”
그제야 나는 정 회장이 계속해서 회장실로 나를 불러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부원장은 의과대학 동기생인 민병근 교수였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부원장이 되어도 딱히 할 일이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정 회장은 흔히 기업에서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 같았다.
“제가 부원장을 맡아도 원장이 계시니 별로 할일도 없겠고, 사사건건 원장과 시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훗날 원장이 된다 해도 분위기가 새로워지지는 않을 테니 부원장은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 회장은 그 후로는 연구소 문제로 날 불러들였다. 나중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여 비서실장 이병규 이사에게 물었다.
“뭘 준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와야 하는 겁니까?”
“할 말이 없어도 오라고 하면 오세요.”
나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회장실에 들렀다. 정 회장은 대화 중에 불쑥 병원에 관한 일을 묻곤 했는데, 훗날 생각해보니 이것이 병원장 면접시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병원장이다
1990년 새해를 맞이하고, 어느덧 2월도 지나갔다. 어느 날인가 정 회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서관 치과 앞에 있는 이사장실로 병원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모두 불려왔다. 문인구 이사도 함께 왔는데, 사전에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늘어서 있는 우리 앞에서 정 회장은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선채로 읽기 시작했다.
“이문호 면(免), 병원장 명(命) 의료원장, 민병근 면 부원장 명 울산대 부총장, 민병철 명 연구소장 겸 부원장 겸 병원장, 이상 천구백구십년 삼월 일일부 아산재단 이사장 정주영.”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정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그 상황은 나도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래 생각이 많고, 행동은 단칼에 순간적으로 하는 것 같아도 그 전에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린 듯 했다. 그랬다가 공표는 이런 식으로 불시에 터뜨리는 방식이 정 회장의 스타일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