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병원 (40화)

신영병원이 빚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나는 수도 육군병원에 가서 레지던트 파견을 부탁했다. 당시 수도육군병원은 대개 젊은 외상환자들을 취급하고 있었는데, 서너 달씩 신영병원에서 부인환자와 소아환자를 경험시키고 보내겠다는 조건을 내세운 덕에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2~3년간 레지던트들의 파견으로 병원은 엄청난 도움을 받았고, 그들 역시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 배운 친구들은 은사라고 지금도 나를 찾아온다. 저녁 숙직은 서울대의대 레지던트들을 불러내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나는 1970년 무렵, 잠깐이지만 정주영 회장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정 회장이 아들 정몽필(작고) 씨의 부인 이영자 씨가 신영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았을 때였는데, 정 회장이 며느리를 문병하러 왔다가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인연은 훗날로 계속되었다.

1972년 무렵, 나는 8백 만원을 주고 녹번동에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아담한 2층집이었다. 1973년과 1974년은 내 인생의 태평성대가 이루어졌던 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교수이자 신영병원 겸직 의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나의 삶속에는 윤활유가 흘러넘쳤다.

1975년이 되면서, 서울대 윤천주 총장은 교수들의 개업의 겸직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주 서슬이 시퍼런 선언이었다. 의과대학 학장이 교수회의를 열고 누가 현재 개업의를 하고 있는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네, 저는 겸직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손을 들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 혼자였다. 학장은 내심 희생양을 찾은 것에 고마워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개업한 교수인 나에게 의과대학 측의 압박이 시작됐다. 인사위로부터 징계를 받고, 4년이면 될 부교수직에 8년을 훌쩍 소비하고서야 정교수가 될 수 있었다. 인사위원회가 열릴 때마다 승진의 기회는 저만치 달아났다. 그래도 개업하고 있는 대신 논문을 많이 쓴 덕분에 8년 반 만에 드디어 정교수로 승진되었다.

다른 교수들은 내가 바람막이를 하는 동안 개업의와 서울대 교수직을 무사히 수행했고, 복도에서 나와 마주치자면 고마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번은 출근을 했더니 내 방 문패의 부교수실 간판이 백묵으로 <명예 부교수실>이라고 고쳐진 채 결려 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명예롭게 여겨진다.

1976년 무렵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당분간 서울대학교 병원에만 전념하기 위해 신영병원 일에는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심하고 후임 원장에게 당부했다.

“빚만 지지마라. 현상유지만 해다오.”

▲ 1976년 서울대병원 시계탑 앞에서

그리고 몇 달 동안 그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해야만 했다.

신영병원은 금방 적자가 났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교수가 된지 1년만인 1977년 서울대 의대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그때 내 나이가 만으로 마흔일곱 살이었다. 사실, 서울대 의대 정교수직을 그만둔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1977년 신문에 정식으로 개업인사를 냈다. 신영병원에 환자들이 쉴틈 없이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도 서울대에서 특진 예우를 받으며 환자가 원한 때에는 초빙수술에 응했다. 정식 교수가 아닌 사람의 특진이라도 환자가 원하면 수술하도록 서울대학교 병원 측에서 조치를 취해주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나오는 특진료 수입은 외과 약국에 전액 기부했다. 전무후무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2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대학교 병원 내 의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쏟아졌고, 보이지 않는 압력이 거세지는 바람에 나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한편, 개업한지 5~6년 만에 신영병원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인 기반이 구축되었다. 이때 쯤 해서 병원부지 기증자의 아들인 이병붕 선생이 미국에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병원을 지을 당시 땅을 기증해준 그의 선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마침 미 학회에 참석했을 때 MVV의 이형모 교수를 만나 간청했다. 그리하여 신장이식 부문 책임자인 이형모 교수가 발 벗고 나서서 MCV에 이병붕 선생을 취직시켜주었다. 덕분에 그는 미 대학병원에서 인턴 코스를 밟지 않고 곧바로 레지던트가 되었다.

1979년 국내에 의료보험제도가 시작되면서, 처음에는 몇 사람 안 되던 보험환자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점자 본격화 되어가는 의료보험 속에 난항을 겪으면서 나는 이쯤해서 병원경영을 정리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미 재정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최소한 가장으로서 책임은 질수 있게 되었다. 또 직책이라는 것은 항상 명예로울 때 그만둬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이병붕 선생에게 전했다.

“신영병원을 임대사업 하는데 내 놓겠네.”“선생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병원 개원의 경험은, 그 시작은 시끄러웠지만 끝은 풍요롭고도 깔끔해서 결과적으로 유쾌한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후 이병붕 선생은 미국에서 개업의로 지내다가 1995년 삼성병원 설립 시 한국에 나와 살았다. 예순다섯에 정년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 현재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