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은 했으나 나에게는 아직 활용할 낮 시간이 많아서 시간을 그대로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그때 나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몇 가지 좌우명이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의 것으로 만들며, 인생을 좌우할 만한 일이 아닌 자그마한 이익은 남에게 양보하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작은 이익을 위해서 서로 다투고 원수가 되며, 시간을 허송한다. 작은 이익을 양보하면 모두가 좋아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리고 남에게 베풀며,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나의 좌우명이었다.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작은 이익은 양보하며, 남에게 베풀면서 주어진 책임을 다할 때, 누구에게나 신뢰를 받는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이었다.
나는 이 좌우명을 생각하면서 1969년 2월 대학원을 졸업한 후 낮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생각하다가 역사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대학원 동기생으로 영남대학교 학예연구사를 지낸 문경헌과 함께 경북대 문리대 사학과 김익호, 오주환, 김엽, 한영국 교수를 찾아갔다.
네 사람의 교수는 대학원을 다닐 때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겠다고 부탁했으나 교수들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데 어떻게 젊은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들을 수 있느냐”고 처음에는 난색을 표명했지만 두어 차례 만나고 나서는 청강을 허락해주었다.
김익호 교수로부터는 <사회학개론>과 <동양최근세사>를 들었고, 오주환 교수와 한영국 교수로부터는 <서양 최근세사>와 <한국최근세사>를 청강했다. <동양최근사>는 청나라 건국무렵부터 시작하고 <서양최근세사>는 프랑스혁명부터였다. <한국최근세사>는 개화기시대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주로 2학년과 3학년 학생들의 강의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자기들 보다 나이가 든 학생이 오니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던지 일주일 후쯤 과대표가 와서 “형씨 제대 복학했어요?”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한 시간도 결강하지 않고 역사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동서양과 한국의 역사는 책을 통해서 접하기는 했으나 사학자(史學者)들에게 직접 듣는 강의는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나에게 열어주었다. 청나라의 프랑스 혁명, 개화기에 대한 교수들의 주장은 나의 문학의 세계를 폭넓게 해저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 한 그때의 일 년 반 동안의 공부가 나의 인생에 두고두고 큰 보탬이 되었다.
하루는 과대표가 나에게 와서 “형씨! 한 주일 후 우리 3학년 학생들이 야유회를 가는데 형씨도 야유회비 내세요.” 하고 말했다. 내가 “얼마요?”하고 물으니까 만원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만원을 주고 야유회에는 가지 않았다. 때때로 학생들은 나에게 농담을 걸고 형의 대우를 깍듯이 해주었다. 1년 정도 한주당 14시간의 역사과목 강의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인생과 세계를 보는 눈도 훨씬 넓어졌다.
겨울방학이 되어 강의가 끝나자 나는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을 배우고 싶어서 그것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고심했다. 그 방법은 1969년 말 대구 제일육군병원(지금은 국군통합병원) 정신과 과장으로 근무하는 이죽내(李竹內) 대위를 찾아감으로써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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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죽내 교수 / 이죽내 군의관은 훗날 경북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출처 ; 경북대 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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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죽내 군의관은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으로 경북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을 지낸 친구였다. 이죽내 대위에게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더니, 첫 말이 “문학하는 사람이 정신분석학 공부는 무엇 때문에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정신분석학>은 문학의 창작심리와 독자들의 수용심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시간의 활용에 대한 것도 덧붙였다.
이죽내 대위는 그러면 “우리 병원정신과 인턴, 레지던트 코스 중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세미나가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2시부터 5시까지 배정되어 있는데, 거기에 참석해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부터 한 주일에 2번씩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 공부를 위해서 제일육군병원을 출입하기 시작했고, 이 공부는 일 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제일육군병원 정신과에는 전문의로는 김성팔, 권영신, 이죽내 대위가 있었고 수련의로는 레지던트 3년차인 오석배 중위와 2년차인 강기용 중위가 복무하고 있었다. 5명 모두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의 정신과 의사들이었다.
세미나는 오석배 중위가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심리학 저서인 <자유로부터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목차 순서대로 발표하고 장기용 중위가 <정신병리학> 분야를 정신의학자 노에스(Noyes)의 의학저서인 <현대임상정신의학>을 발표했다. 그리고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김성팔, 권영신, 이죽내 대위가 돌아가면서 강의를 했으며, 이죽내 대위는 개별지도까지 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세미나 초기에는 발표내용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의학전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반 이상이 영어가 사용되는 발표와 강의여서 국문학을 전공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6개월이 지나면서 강의내용이 조금씩 이해되어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프로이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정말 재미있는 학문이며, 우리 생활의 어느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는 효용성이 많은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동세(韓東世) 교수의 <정신과학>을 통독하고,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매닝거의 <인간의 마음(Human Mind)>과 <애증(愛憎)>을 열심히 읽고, 프로이드와는 다른 방향에서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의 이론을 세운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 카렌 호나이 등의 문화학파의 이론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정신분석을 토대로 성립된 초현실주의 문학과 ‘의식의 흐름’ 소설을 재인식하고, 노드립 프라이의 <신화비평>의 저서들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든 열정을 쏟으면서 시작한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 공부 과정이 일 년이 넘어서면서 나는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신병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정신분열증에 포함되는 자폐증, 피해망상, 과대망상, 관계망상, 치매 등의 정신황폐와 불안상태의 증상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신경증의 증상이 되는 불면증, 신경에서 오는 심한 요통과 두통, 원형탈모, 이유 없는 마비 증상, 조증(mania), 울증(melancholia)이 반복되는 조울병과 자살, 알콜중독에 의한 반사회적 성격 등을 어느 정도 진단할 수 있다는 자만심도 생겼다.
이 무렵 나는 <한국정신신경의학회>가 발행하는 학회지 <정신신경의학연구>를 읽으면서 문학과 정신분석을 연계시킨 서울대학교 정신과 이부영(李符永) 교수의 <구지가(龜旨歌)>의 정신분석학적 고찰>를 읽으면서 우리 한국 현대작가들도 그들의 문학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정신병리학적 진단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경북대학교 정신과 교수를 역임한 정창용 교수의 ‘정창용 정신신경과 의원’에서 이죽내, 김성팔, 권영신, 오석배 등 <제일한국병원>의 군의관들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강석헌, 윤석하 교수들과 함께 나는 불교의 ‘선(禪)’에 대한 해석을 문경헌 교수로부터 들었다.
이 공부를 계기로 한국에서 칼 융의 대가가 된 이죽내 교수가 <원효사상의 정신분석>, <저인분석과 현존재분석>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