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36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12.12신군부 쿠데타사건 이후 서울의 분위기는 프라하의 봄과 같은 민주화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연일 계속 된 서울의 학생데모는 전국 대학으로 번져가서 대학의 학사는 방향타를 잃어버린 혼란으로 이어졌다.

관동대학도 확과 내부의 문제로 교수들의 반목이 심했던 음악과, 관광학과, 영문학과 학생들이 먼저 데모를 시작했다.

학내 문제로 시작된 학생데모는 신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총학생회 회장 최종호와 학예부장 심상률이 국어교육과 학생이었고, <창작과 비평>에서 시 추천받기를 원한 장세환 학생도 정부를 성토하는 일에 늘 앞장을 섰다.

1980년 5월 어느날 관동대학 학생들은 강릉 시가지로 나가서 시위하기로 결의했다. 시위할 학생들이 교정에 모이고 있을 때, 장세환 학생이 나의 연구실로 찾아와 “제가 시위에 참가해야 하는데 교수님께 가방 좀 맡기러 왔습니다.”하고 가방을 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는 좀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자네 틀림없이 맨 앞에 서서 시위하겠지?”라고 물으니 그는 “제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는 지금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까 데모를 하는 것은 좋으나 중간쯤에 서라.”고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장세환은 “잘 알겠습니다.” 하고 나가서 데모대의 맨 앞장에는 서지 않고 선두 후미를 따라가면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진로를 가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틀 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관동대학 학생들도 20여명 이상이 검거되어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장세환 학생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고, 얼마 후 서울 혜성여고 교사로 발령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소원대로 <창작과 비평>에 추천이 되어 현역 시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여름방학이 가까이 오면서 대학교수들의 분위기가 변해갔다. 초기에는 그런 기미가 없었는데, 김영돈 학장을 싸고도는 서울사대 출신들이 그룹을 지어 특정세력을 만들려고 했다.

▲ 1980년 서울의 봄 때, 시국성토를 위해 서울역 앞에 군집한 학생들 [출처 ; 민주로드]

서울사대 출신이 아닌 교수들은 드러내놓고 불평을 하지 않았으나 내면적으로는 상당한 반발을 하고 있었다. 철학을 강의하는 서윤택 교수가 날카로운 항의를 하기도 했다. 나도 기분이 언짢아서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나는 서울의 집에 가 있으면서 자료수집을 위해서 국회도서관에 자주 들렀다. 대학의 전공강의를 맡으면서 내가 학문적으로 너무 부족하다는 것과 어떤 일이든지 자기가 생각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몰두하고 미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대학 동기생 이길영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미 8월 11일 저녁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길영 교수의 소식은 6년 만에 들어본 셈이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이길영 교수는 대학 동기생이기도 하지만 청구고등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어서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68년 나는 원화여고로, 그는 삼척공전으로 영전하게 되어 서로 헤어지게 된 후, 이길영 교수가 대전공전에 재직하고 있던 1974년 이른 봄 우연히 서울역에서 만났을 때, 박사학위 공부를 위해서 일본으로 출국한다고 들었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는 정말 반가웠다.

서로 안부 인사를 한 후 그는 “내일 인천 제물포다방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이튿날 나는 기차를 타고 제물포다방으로 갔다. 제물포는 신림동 집에서 40분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제물포역 근처에 있는 제물포다방에서 만난 이길영 교수는 나와 인사를 나눈 후, 자기는 일본 대판대학에서 환경공학 박사를 받고, 귀국해서 3개월 전에 인천대학에 와서 강의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인천대학에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1~2년 후에 명지대학으로 갈 가능성이 있고, 인천대학 설립자인 백인엽 장군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갈 생각이 전혀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길영 교수는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대구 영남공전에 근무하던 최국광 교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최 교수와 영남공전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어서 잘 안다고 말했더니, 최국광 교수는 “현재 인천대학 교학부장의 보직을 맡고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나의 의사를 물었다. 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만나보겠다.”고 말하고, 우리 두 사람은 인천대학으로 들어갔다.

이 교수로부터 인천대학은 설립된 지 일 년 반밖에 안된다고 들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건물이 너무도 웅장해서 입을 벌릴 지경이었다. 건물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올라가서 공학부장실로 들어가니 최국광 교수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최국광 부장은 “인천대학은 작년 ‘인천공과대학’으로 설립되어 금년 교명을 인천대학으로 바꾸었는데, 공학부의 기계공학과, 건축공학과, 토목공학과, 전자공학과, 전기공학과 이외에 금년에 신설된 영문학과, 불문학과, 독문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야간 경영학과, 무역학과가 있다.”고 학교의 내용을 설명했다.

지금은 공학부의 교양학부 뿐이지만 내년에 국어국문하학과를 비롯한 학과가 대폭 증과된다고 말하면서 “인천대학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길영 교수와 똑같은 권유의 물음이었다. 나는 이길영 교수에게 답변한 것과 유사한 말로 나의 의사를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 장 교수의 뜻을 알겠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백인엽 장군을 한번 만나보면 어떠냐?”고 묻기에 사람이 사람을 못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 한번 만나보겠다고 최국광 교수의 의견에 동의했다.

최국광 교수와 나는 공학관으로 갔다. 학교의 캠퍼스가 매우 넓고, 돌로 지은 본관 석조건물이 우람한 모습으로 2층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공학관은 외형도 거창했지만, 내부도 매우 넓었다.

백인엽 장군(백 장군은 재단이사장이나 상임이사보다 장군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은 공학관 일층에서 기계설비를 하고 있는 작업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농구화를 신고 여름 남방을 가볍게 입고 흰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은 완전히 현장 감독의 품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호랑이상에 눈매가 매우 날카로웠다.

최국광 교수와 백 장군 사이에 사전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최 교수가,

“관동대학에서 온 장윤익 교숩니다.”

하고 인사를 시키자 백 장군은 나를 아래 위로 한참 살펴보면서,

“장 교수, 정말 반갑소. 내일부터 우리 대학에 당장 오세요. 이번 달은 우리 대학에서도 월급을 지급할 테니까 관동대학에서도 월급을 받으세요. 오리라고 믿소.”

이렇게 말하고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최국광 교수에게 주면서,

“오늘 장윤익 교수를 잘 대접하고 먼 강릉에서 오셨으니 나머지는 배행기 값으로 장 교수에게 드리세요.”

하고는 작업을 지휘하는 자리로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