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의 당간지주 펄럭이는 평가의 깃발 (36)
  제13장 지인들이 본 장윤익4

이론의 당간지주 펄럭이는 평가의 깃발 
 
김선학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교수>

<자의식 문학과 난해의 한계성>은 장윤익 선생이 197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평론이다. 

이상(李箱)의 시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정면돌파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비판적 혜안으로 이상 문학의 자의식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1972년은 어언 4반세기의 세월을 한참 웃도는 지난날, 대학원에서 첫학기를 마치고 국방의 의무를 완수, 군복을 벗는 해였다. 문학청년이었던 시절, 문청기(文靑期)시절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문학이 세상의 전부라고 파악하고 문학을 통해 세계와 삶과 현실을 읽어내는데 자신만만했던 치기어린 시절이었다. 통음하면서 당대의 문학에 쓰잘데기 없는 질타를 고래고래 고함쳤던 폭풍노도의 철부지 시절이었다. 

장윤익 선생의 <자의식문학과 난해의 한계성>을 읽고 가당치 않은 문청의 모습이 부끄러워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이 평문은 바위처럼 짓눌렀고, 더 공부하라는 채찍이 되어 전신을 내리쳤고, 알량한 문학소양을 여지없이 초토화시켰다. 

장윤익 선생의 글은 내가 서 있는 자리와는 사뭇 먼 거리에 있었다. 까마득한 문학의 평원에서 이론의 당간지주에 평가의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평론이란 장르에 함께 매달리면서 장윤익 선생의 글을 만날 때마다 지난날의 이 회상은 또렷하게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 같은 공간의 다른 대학에서의 각각 문학으로 먹고 살면서 <경주의 소설문학>이란 것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의했다. 

장혁주를 재조명하고 이기현을 발견한 것은 큰 보람이었다. 그들이 소설에서의 동리와 시에서의 목월 만큼 경주와 끈질기게 연결된 비운의 작가였음을 우리는 확인했다. 장혁주가 1931년 일본잡지 <개조(改造)>에 1등이 없는 2등으로 당선한 작품 <아귀도(餓鬼道)>를 70여년 만에 최초로 오경환 선생께서 한글로 유려하게 번역한 일은 한국 현대문학사제 작지만 확실한 사건이라고 할만 했다. 

잊어 버리고 있었던 작가 이기현을 발견한 것은 장윤익 선생이었다. 이근식, 권윤식, 이희목, 서영수, 정민호 선생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수소문하여 취재하고, 아직도 경주에 살고 있는 이기현의 집안들을 일일이 찾아본 것도 장윤익 선생이었다. 부산에 있는 이기현의 아드님과 여러차례 만나 그의 작품과 그것에 얽힌 사연을 취재하였다. 

장윤익 선생의 부지런함과 열정적인 모습을 그때 확인할 수 있었다. 밤을 새우면서 그것을 정리하고 원고에 매달리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지런함과 열정, 그것이 두 대학의 총장직을 수행할 수 있게 한 저역임을 알 수 있었다. 
 
     
▲ 김선학 전 동국대 교수, 문학푱론가      
대학의 총장이라는 자리는 많은 난제들을 지성적 합의로 아우르면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이해와 설득을 병행해야 하는 직책이다. 행정적 능력만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자리다. 날카롭게 문제점을 지적해내어야 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아가페적 열정과 부지런함이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장윤익 선생의 면모 속에서 이 직책을 감당해낸 능력과 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족탈불급일 수밖에 없는 부러움이었다. 

장윤익 선생의 비평작업 초기는 시론 쪽에 많이 기울어져 있다. 후기에 오면서 소설론 쪽으로도 그 관심의 폭을 넓혀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경주가 낳은 한국문학 불멸의 작가인 동리와 목월에 대한 장윤익 선생의 애정은 시론과 소설론 이 둘에 비평적 관심을 아울러 쏟았던 것과 상관한다고 생각해왔다. 

시에 있어서의 목월과 소설에 있어서의 동리를 함께 아우르면서 그들 문학의 본향인 경주에 그들의 문학적 성취를 착근시키기로 장윤익 선생의 생각이 가닿은 것은 이러한 비평적 작업의 연장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동리, 목월 기념사업회>를 장윤익 선생이 발족할 때 큰 박수를 보냈다기 보다는 반신반의였다고 헤아려줬다. 

강력한 추진력 열정적인 부지런함이 반신반의를 극복하고 <동리, 목월기념관> 건립 국고보조를 끌어내었던 것은 하나의 신화다. 

40억이 웃도는 국고보조금이 결정되었을 때 다만 고개가 숙여졌다. 문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문학의 모습을 정확하게 착근시켜 문학사적으로 정리하겠다는 한 비평가의 집념과 노력, 발로 뛰었던 땀과 고충의 혈흔을 거기에서 볼 수가 있었다. 

이차돈이 목에 흰피를 쏟는 그 이적으로 불교를 신라에 공인시켰던 것을 기려 창건했다는 <백률사>바로 아래 <반야>라는 목로주점이 있다. 밤 이슥한 시간 그곳에 가면 희미한 조명아래 반가운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당대의 경주문화를 이끌어가는 원로들의 주름진 얼굴에서 신산한 삶의 족적과 문화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문학의 면모를 읽을 수도 있게 된다. 장윤익 선생의 단단한 모습과 조우하기도 한다. 

벌써 정년이라니! 

장윤익 선생께서 정년이 임박했다는 말을 듣고 모두 놀란다. 아직도 청년같은 기개와 건강과 열정을 지니고 있는 그 모습에 세월이 멈추었어야 한다고 대갈하는 분도 계신다. 그러나 세월은, 세월은 멈추어주지 않는 것, 머지않아 내게도 닥칠 이 시절을 생각하면 다만 하염없어지기도 하는 것을.

장윤익 선생의 정년을 맞아 신통찮은 글재주로 몇 개 나와 얽힌 일들을 적으면서 왜 이렇게 가슴이 텅 비는 것 같은가. 선생님 아직도 건강한 그 모습 그대로 문학의 평원에 이론이 당간지주로 더 힘차게 평가의 깃발이 펄럭이게 하소서. 건필하소서.  

 
  동주(東洲) 선생 퇴임송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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