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교부와 청와대에 투서까지 오가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은 후 재단의 일부가 개편되어 이호(李皓) 법무부장관이 재단이사장으로 들어오면서 1983년 6월 중순 경 김민하 학장이 사표를 내고 퇴진했다.
김 학장이 물러난 후 잠정적인 학장 대행업무는 교무처장으로 발령을 받은 장학식 교수가 수행했다. 김 학장을 퇴진시킨 공신들은 이미 누구는 학장, 누구는 대학원장, 교무처장, 사무처장 등의 보직을 재단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짜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교수와 국회의원, 주불대사를 역임한 민병기 학장이 부임하면서 보직의 양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교무처장에 김선형, 학생처장에 이우윤, 사무처장에 허돈구, 대학원장에 김재관 등이 임명되고, 공신(功臣)으로 자처하던 교수들은 사무처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밀려나 있는 상태였다.
나는 학보사 주간과 인사위원을 그만두고 문교부가 파견하는 교수 해외연수에 갈 준비에 신경을 기울였다. 6월 중순부터 7월 초순까지 박사학위 논문발표와 심사를 받고 8월에 들어와서 <한국서사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나는 연수할 지역을 미국과 프랑스로 압축하고 공부할 대학을 미국의 <버클리주립대학>과 프랑스의 <파리7대학>을 놓고 고민하다가 <파리7대학>을 선택했다.
연수지역이 프랑스로 결정되자 문교부가 위탁한 외국어대학교 어학원에서 프랑스의 필기시험과 회화시험에 통과함으로써 국내에서 해야 할 일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내가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60년 대학 1학년 때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여 강의를 들은 시기부터였다. 프랑스어 강의를 한 학기 내내 들여다 본 것이 10시간 정도밖에 안 되었고, 동사변화도 들어가지 못한 기초수업으로 끝나 제2외국어는 대학 교과과정에 구색을 맞추기 위한 교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1학기 내내 프랑스어 강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하나도 머리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대구에 프랑스어 학원으로는 유일하게 개설된 <박두용 프랑스어 연구소>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입시를 위해서 학원에 나온 경북고등학교 3학년 학생, 효성여자대학교 학생, 나, 3명이 이휘영의 교재 <초급프랑스어>와 <중급프랑스어>를 끝내고 앙드레지드의 <레까베 뒤 바티깡(Les caves du batican : 법황청의 지하실)을 교재로 선택하여 공부했다.
이러한 학원공부의 대가로 경북대학교 대학원 시험에 프랑스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하게 되었고, 합격이 되자 전공주임 이재수 교수는 프랑스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프랑스어 공부는 1976년 7월 내가 명지대학교 박사과정 시험의 제2 외국어를 프랑스어로 선택한 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YMCA에 개설되어 있는 프랑스 학원 <빠자빠(PAS A PAS)>에 등록하여 초급과 중국 프랑스어를 주세경 선생과 민계숙 선생에게 배웠다. 초급과 중급 프랑스어를 일 년 정도 배웠으나 실력은 그렇게 늘지 않았다.
내가 인천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지 1년 반이 지난 1982학년도 신학기 강의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연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빼앗기다보니 내가 쌓아야 할 학문연구와 어학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는 낭비의 시간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의시간과 겹치지 않는 시간을 불문학과 2~3학년 강의시간에 맞추다보니 12시간을 불문학과 강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남정만 교수의 <불(佛)소설>, 황극선 교수의 <불 희곡>, 이수진 교수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 고혜영 교수의 <현대 프랑스 소설> 강의를 들으려고 교수들을 방문했다.
불문학과 교수들은 평소 나와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데 별로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교수들을 만나서 나의 뜻을 전달하니 “좋으신 생각이지만 동료 교수가 강의에 들어와 있으면 학생들과 마음 놓고 농담도 못하고, 또 감시받는 느낌이 들어서 난처하지만 어쩌겠습니까?”:라는 말로 승낙해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첫 시간부터 강의에 들어갔다.
남정만 교수의 교재는 카뮈의 <에드랑제(이방인)>이고, 이수진 교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 황극선 교수는 사르트르의 희곡 <안티콘느>와 시사불어, 고혜영 교수는 마르셀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 이었다 나는 학과의 업무나 학교의 업무, 특별히 급한 용무가 아니면 빠뜨리지 않고 강의시간에 충실히 들어갔다.
당시 불문학과의 최고 학년이 3학년이었는데, 2~3학년 학생들 전부가 나에게 <교양국어>를 배운 학생들이었다. 첫 강의 시간에 들어가니, 학생들은 인사를 하면서도 웬일인가 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교수들이 사정을 말하고 강의를 시작했지만 학생들은 교수가 학생들과 강의를 함께 듣는 것을 약간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학기가 다 지나갈 무렵부터 학생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내가 충실히 강의에 참석하고 프랑스어 실력이 자기들보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점차로 존경스럽다는 눈초리로 변해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2년 반 정도를 학생들과 함께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불문학과 학생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오히려 내가 소속되어 있는 국문학과 학생들보다 더 가까워졌다. 학과의 연극행사나 다른 행사가 있으면 나를 초청했다.
프랑스어 강의를 들은 지 3학기가 지난 5월 어느 날 교내에서 우연히 불문학과 학회장과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면서, “교수님은 우리 학과 강의를 듣고 계시니까 우리 불문학과 학생입니다. 교수님 학회비 내세요.”하고 말했다. “학회비가 대체 얼마야?” “2만원입니다.”라고 하기에 나는 4만원을 건네주었다.
불문과 학생 중에서 총학생회 부회장을 지낸 채인식 학생은 나중 프랑스에 와서 내 숙소에서 두 주일이나 묵어간 일도 있었다. 나의 프랑스어 실력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 대학의 전공과목 수강에서 놀랄 정도로 늘게 되어 지금도 불문학과 교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빠지빠>의 민계숙 선생도 나의 프랑스어 실력향상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민 선생은 이화여대 불문학과 출신으로 진명여고 불어교사로 근무하다가 결혼한 후,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에 나온 프랑스어 강사였으며, 한양대 불문학과 민희식 교수와 공역으로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할 만큼 실력이 알찬 선생이었다. 나중에 한양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와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선생님이었다.
프랑스어 전문학원 <빠자빠>는 당시 <알리앙스 프랑새>와 함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서울의 대표적인 학원이었다. 그러나 이 학원은 주세경 원장의 개인사정으로 1983년 6월경 문을 닫게 되었다.
집세는 3개월 정도 여유가 있어서 민계숙 선생은 그 당시 고급불어를 신청한 3명의 수강자들에게 앙드레 말로의 소설 <정복자>를 교재로 선택하여 3개월 만에 끝내고, 폴로베르의 <보봐리 부인>과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 <비계덩어리>, <여자의 일생>를 교재로 선택하여 강의를 계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