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6대도시 중의 하나인 그레노블은 해발 4,500m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곳이고, 세계적인 소설가 스탕달과 음악가 베를리오즈의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공기가 맑고 산이 좋아 일찍부터 살기가 좋은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어학연수를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어학연수원에서 연수생들을 위해서 니스, 모나코, 안티프, 칸 등 지중해 연안을 3박 4일로 연수한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연수회비는 불과 340프릉(우리 돈으로 34,00원) 밖에 안 되는 아주 싼 비용이라서 나는 재빨리 신청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관광버스에는 안내하는 그레노블대학 어학 연수원 조교와 40여명의 연수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한국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독일, 이태리, 영국, 태나다, 미국, 스페인, 멕시코, 컬럼비아, 이란 폴란드, 중국, 일본을 비롯해서 16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거의 모르는 연수생들이었으나 그 중에 두 사람은 안면이 있었다.
한 사람은 ‘엘레나’라고 하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에 유학할 목적으로 프랑스어를 배우러 온 여학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 국립 마드리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러 온 ‘블랑가’라고 하는 여학생이었다. 나도 무척 반가웠지만, 두 사람은 얼싸안은 정도로 기뻐했다.
아직 프랑스어가 서툴기 때문에 조교가 하는 빠른 프랑스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해서 내용을 파악했다.
우리 세 사람은 늘 함께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니스의 누드해변에서도 그러했고, 모나코의 몬테칼로나 피카소가 젋은 시절에 살았던 안티프의 <피카소기념관>, 칸 등을 관광하면서 우리들의 우정은 매우 깊어졌다.
서로 껴안다시피 해서 찍은 사진이 아내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것이 그들 나라의 습관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의 남녀의 부딪힘은 자연스럽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국경을 초월해서 모두 같다는 것을 나는 이 여행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다. 그녀들과의 인간적 교류는 연수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를리오즈의 기숙사 생활은 거기에 거주하는 한국 연수생들이 45세인 나를 최고 연장자로 받들고 대접해주었기 때문에 아주 즐겁게 지냈다. 토요일 오후의 저녁과 일요일 저녁식사는 7~8명이 늘 함께 했는데, 나는 내 몫으로 할당된 비용만 내고, 식사 준비는 젋은 연수생들이 수고해주었다. 나이 든 것도 좋을 때도 있었다.
9월 중순경 추석날이었다. 이날 베를리오즈, 꽁다악, 똘비악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어학연수생들과 그레노블대학에서 학부, 석사, 박사학위 과정에 다니고 있는 현지 유학생들이 대학 운동장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서 축구시합과 줄다리기를 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유학생들의 부인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만들어 온 반찬과 밥, 쇠고기 국으로 식사를 하면서 고국을 떠나온 방향의 정을 달랬다.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은 바로 이런데서 싹트는 것이라는 것이 마음에 새겨졌다. 그날 식사는 서주석 동자부 국장 댁에서 몇 사람만이 초대되어 즐거운 만찬의 시간을 가졌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나는 이기수 장로댁에 맡겨둔 짐을 찾으려고 제네바로 가서 3일을 지낸 후 고속전철(TGV)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파리까지 열차표를 구입하는 일을 이기수 장로에게 맡겼는데 자리에 앉고 보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여객 전무는 나에게 표를 두 장 사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 혼자뿐이라고 하니까 여객 전무는 내용을 잘 모르겠으나 표에다 어떤 말을 기록하고 사인을 한 후 사인을 하고, 파리의 리옹에 가서 나머지 한 장의 표 값을 환불받으라고 말했다
아마 제네바의 역무원이 이기수 장로와 나 두 사람이 있으니까 한 표에 좌석 두 자리를 배정하고, 차비를 받은 것 같은데 이기수 장로가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만약 한국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당신이 잘못해서 빈 자리가 생겼으니까 철도청에서는 손해를 볼 수 없으니, 차비를 당신이 물어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나는 프랑스 공무원들의 봉사하는 근무자세를 알게 되었다. 리용역에서 10%를 공제한 고속전철차비를 환불받으면서 10월부터 파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파리의 생활은 시떼 유니버 시떼르(Cite Univer citaire 기숙사촌)의 돗찌관(프랑스관)의 등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돗찌관 3층의 나의 방은 일 년 반 동안 나의 안식처인 동시에 한국 유학생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며칠 후 나는 파리7대학 동양학부 이옥(李玉)교수를 방문하여 교환교수 신고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한국학 전공의 학생들을 만나 의견교환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리 4대학(소로본느대학)어학연수원에 등록했다. 대학의 학기와 똑같이 시작해서 하루 6시간씩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이 이 어학원의 특징이었다.
나는 기초반(데뷔당)에 등록했다. 발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기초반을 선택했는데, 수업을 받으면서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반 담임인 마담 또레스 교수는 소르본느대학 프랑스 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어학교육에는 베테랑 선생이며, 어학연수원 교장이기도 했다.
교실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교실에는 수업에 필요한 교재와 교구들이 가득 차 있어서 수업할 때 직접 보여주면서 현장교육을 하는 철저한 교육시스템이었다. 하루에 6시간씩 수업하며, 수업이 끝나는 15분 전에 틱떼(받아쓰기)를 한 다음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숙제를 받은 후 3시 반경이 되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험을 치러서 틱떼 점수, 숙제점수, 시험점수가 공개되기 때문에 연수생들은 서로 경쟁을 하게 되고,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있기 때문에 점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의 조성을 통해서 공부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프랑스의 교육시스템이었다.
15명으로 짜여 진 클래스연수생들의 국적은 미국, 영국, 이란, 독일, 유고, 이태리, 캐나다, 콜롬비아, 한국, 일본, 그리스, 이란 등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연수생들은 미국 선교사 마크 뷔록 부부와 친해져 몇 차례 초청을 받기도 했다.
6개월 과정이 끝나면 졸업시험이 있고, 거기에 합격해야 무와엥 반(중급반)에 진학할 수 있다. 나는 1월에 통과시험을 쳐서 세르띠삐까(졸업증서)를 따면서 기초반 초청을 받기도 했다.
나는 1985년 2월 초 므와앵반에 등록했다. 중급반과 쉬페리에르(고급)반의 교육진행은 기초반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급반의 수업은 1~2교시의 발음 연습과 레버실의 듣기와 말하기 연습, 교재의 읽기와 해석은 같으나 문법연습이 추가되고 3~4교시에는 무교재를 사용하여 공부하고 슬라이드로 교재를 확인하는 교육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5~6교시에는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데, 나는 프랑스의 고딕양식과 로코코 미술양식,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과 미술에 대해서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