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떼는 기초반과는 달리 카뮈의 <이방인>이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같은 소설작품을 5~6페이지 정도 천천히 두 번 읽어주고 10줄로 요약해 쓰도록 하는 방식의 받아쓰기였다.
받아쓰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듣는 능력, 요약하는 능력, 정확하게 쓰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시행하는 이 딕떼 훈련은 발표능력과 빨리 이해하고 쓰는 능력을 기르는 최선의 교육방법이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하루 두 시간 씩 공부하는 회화전문학원 <피압>에 다니면서 터키, 미국, 캐나다, 인도네시아, 덴마크, 네덜란드, 이란, 시리아 등의 외국 사람들을 만났다.
중급반을 마치고 졸업 시험을 보아서 디프로마(학위증)을 딴 후 고급반에 등록했다. 고급반은 정치, 경제, 법학, 문학, 공학 등 전공별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문학전공 과정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구라파 한국학회> 모임, 기타 여러 사정으로 중도에서 끝나게 되었다. 서로가 손을 잡으면서 눈시울을 붉히면서 헤어진 이 연수기간을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남는 보람의 시간이었다.
시떼 유니버 시떼르의 나의 숙소에는 밤이 되면 많은 한국사람들이 방문하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와 프랑스의 생활을 소재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의 꽃을 피웠다.
나와 같은 층에 살고 있는 명지대의 송문영 교수, 아주대 김하진 교수, 영남대 성낙인 교수, 경제기획원 김학정 사무관, 상공부 안세영 사무관, 이화여대 최영호 선생, 백원기 선생, 원용수 선생, 신태영 검사, 고려대 정규복 교수, 전남대 임채완 교수 등이 자주 출입했다.
정규복 교수는 토요일마다 내 방에 와서 내가 정성들여 담근 김치와 쇠고기 찌개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즐거워하셨다. 정 교수의 르와르강 주변을 여행한 추억이 지금도 아련하게 남아 있다.
김학정 사무관과는 그레노블 대학 어학연수 때에 만나서 파리로 옮겨 생활하면서 <끼자스 도서관>, <주네바에브 도서관>, <퐁피두 도서관> 등에서 늘 함께 공부하고, <모네 기념관>, 라삐갈, <발자크의 집>, 몽마르트라, 룩셈부르크 공원, 생미셀 거리를 자주 찾아보고 거닐기도 하면서 다소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와는 귀국해서도 줄곧 만나서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하고, 프랑스 유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안세영, 백원기, 송문영, 서주석, 성낙인, 신태영 등 여덟 사람이 <뭉수리회>를 조직하여 내가 회장이 되고, 김학정 사무관이 총무가 되어 일 년에 두 번 정도 만나 프랑스 시절의 추억을 화제로 삼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김학정 사무관은 귀국 후 서기관이 되어 예산과장으로 승진하고, 기획원에서 차관이나 장관까지 바라보는 능력이 뛰어난 공무원이었으나 1994년 예산편성 후 예산국 직원들이 위도로 위로 출장갔다 페리호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침몰사고로 사망한 정말 아까운 엘리트공무원이었다. 지금도 그레노블과 파리의 세느강에서 활짝 웃던 밝은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안세영 사무관은 상공부 과장, 국장을 거친 후 학계에 뜻이 있어서 지금은 서겅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 있으며, 송문영 교수는 수원대 사회대학장을 역임했고, 성낙인 교수는 서울대 교수로, 신태영 검사는 법무부 과장, 서울지청 차장검사, 성남지청장, 의정부지청장을 거친 후 변호사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며, 백원기 교수는 인천대학교 법과대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백원기 교수는 스페인 여행을 함께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유학생회장 선거관계로 서로 사이가 멀어져 있었던 원용수 교수와의 화해를 위해서 백 교수를 원 교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서로 사과하게 하고 다시 원래의 친구로 돌아가는 일을 주선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저는 전남대학교에 재작하고 있는 임채완 교수입니다, 방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한국대사관의 교육관을 찾아가서 상의하니까 장윤익 교수를 찾아가서 의논하라고 해서 연락드립니다.”라는 내용의 전화가 왔다.
나는 곧 오시라고 했고, 15분 후에 임 교수가 내 방에 왔다. “저는 지금 이 기숙사촌의 인도관에 빠사쥬로 거주하고 있는데, 곧 방을 비워주어야 하니까 기숙할 방을 알아봐주면 좋겠습니다.”라고 부탁해왔다.
나는 여러 사람에게 알아볼 테니까 그것은 염려하지 마시고, 세느강 구경을 했느냐고 물으니 아직 구경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때 임채완 교수는 매우 다급하게 보였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세느강의 유람선 바또무슈로 세느강 유람을 함께 하고, <노틀담 성당>을 관람시킨 후에 셍미셀의 카페에서 식사를 가진 것이 임 교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노르망디에 있는 몽셍미셀과 생말로를 함께 관광했고, <모네의 집>과 르와르강 주변의 사또(성)와 성당을 여행하면서 서로 격의 없는 우정을 쌓았다. 내가 귀국할 때 선물을 꼭 하나 하겠다고 하기에 나는 가방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는 사뜨르 레알의 백화점에서 나를 데리고 가서 마음대로 고르라고 해서 산 그 가방을 나는 귀국해서 5년 이상이나 메고 다녔다.
아주대학교 김하진 교수와는 파리연합교회에서 만나서 이태리 여행과 사또드 비꽁뜨라는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아름다운 성과 나폴레옹의 애인 조세핀이 살던 말메종, 칼 부세, 사르트르, 쇼팽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도 함께 찾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의 프랑스 연수는 좋은 분들을 만남으로서 재미있고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낸 생활이었다.
1984년 11월 초 아내가 프랑스에 왔다. 나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제네바의 이기수 장로 댁에도 다녀왔고, 독일의 프랑크프르트의 <괴테의 집> 로렐라이, 본, 하리델베르크, 퀴논 등 여로 곳을 관광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영화 <황태자의 첫 사랑>에 나오는 생맥주홀에서 알콜 성분이 없는 맥주를 마셔보았다. 로렐라이의 낭만이 되살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여행은 아내의 친구의 동생 프랑크푸르트 대우 지사 임태길 과장이 안내해서 더욱 알찬 여행이 되었다.
12월 30일 새벽 이탈리아로 떠나는 알라앙스 여행사의 관광버스를 탔다. 아내와 동행하는 7박 8일의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한국 사람은 김하진 교수 부부와 우리 부부 4명인 줄 알았는데, 무역관계로 온 무역회사 과장이 한 사람 타고 있었다.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가기 전 어떤 휴게소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약간 검은 동양인 한 사람이 내 근처에 오면서 한국말로 “도대체 말을 못 알아들어서 환장하겠네. 혹시 한국사람이 아닙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이제야 한숨 놓을 것 같네.”라고 하면서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온 토목기술자였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벤쿠버 근방의 서부 캐나다 도로공사의 현장감독이며, 이름은 김건수라고 하는 매우 순박하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관광버스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꾸불꾸불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저녁 무렵 토리노에 도착했다. 토리노는 피아트를 비롯한 자동차 공장과 여러 분야의 공장들이 있는 공업도시였다. 토리노에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 피사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