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한 피사는 한때 지중해의 도시국가로 해양강국이기도 했다. 피사의 사탑은 그 웅장한 규모와 무게가 기울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정말 신비롭게 보였다. 어쩌면 이것은 종교의 신비인지도 모른다.
또한 피사는 피자의 진원지가 되는 곳이라, 탑 근처의 피자집에서 피자를 사서 맛있게 먹었다. 원산지의 맛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피사에서 두 시간 정도 관광과 휴식을 취한 후 로마로 향했다. 로마는 저녁 무렵에 도착했고, 그 날은 연말이었다. 중국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호텔의 나의 방에서 연말 파티를 열었다.
우리 부부, 김하진 교수 부부, 무역회사 과장, 캐나다에서 온 김건수 감독 등 여서사람이 음식도 먹고, 노래도 부르고 하면서 여수와 향수의 마음을 달래고 우의도 다졌다.
그 자리에서 나는 김건수 씨에게 1974년 캐나다로 이민 간 나의 외동생 손성호의 주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김건수 씨는 아마 서부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캐나다가 워낙 넓어서 찾기 어렵지만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1월 1일에는 바티칸과 콜로세움, 카타콤 등을 관광했다. 거대한 로마 문화를 실감하면서 순교와 고난으로 얼룩진 초기 기독교인들과 고난사가 눈물의 흔적으로 다가왔다. 영화 <쿼바디스>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부르짖으며 기도하던 베드로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라벤나를 거쳐서 1월 3일 피렌체에 도착할 무렵에는 저녁노을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도시이며, 이곳에서 활동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의 그림들이 60여 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스의 고전연구를 위한 아카데미가 곳곳에 세워진 문화의 요람지 피렌체는 이태리 사람들의 긍지를 높여준 도시이다.
이 여행은 나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의 예술을 맛보는 더할 수 없는 기회가 되기도 했지만, 라파엘의 위대성을 새롭게 느끼게 한 계기로도 의의가 있었다. <피렌체 성당> 지하 무덤에는 마키아벨리의 관이 놓여 있고, 대성당 옆에는 <단테의 집>이 있었다.
르네상스를 꽃피게 지원한 매디치가(家)의 문화에 대한 높은 안목은 세계의 모든 재력가들에게 돈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 르네상스를 남긴 것이다. 사람은 죽어도 그들이 이룩한 예술과 문화는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을 피렌체는 우리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었다.
1월 5일 저녁 베니스에 도착했다. 물의 도시 베니스는 중세와 근세의 초기 상업과 무역으로 지중해를 지배했던 소국이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첫 출발의 자리로 설정한 베니스는 지중해를 지배했던 그때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 아니더라도 십자군의 출항지 베니스는 그 애환이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가득찬 출렁이는 물은 여인들의 눈물처럼 느껴져서 십자군의 의미가 새롭게 부상되었다. 베니스에서 1박한 후 다음날 밤늦게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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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사의 사탑 앞에서 / 아주대학교 김하진 교수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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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경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 철현이의 공부 문제로 아내는 귀국하고, 나는 이옥 교수의 추천으로 <구라파 한국학회(AKSE)의 회원이 되었다.
해마다 부활절 바캉스는 2주 정도 되는데, <구라파 한국학회>는 이 부활절 기간 중에 구라파 각 나라를 돌아가면서 발표회를 개최했다. 그 해에는 프랑스의 상띠유에서 학회가 열렸고, 총무는 프랑스 학자 오랑쥬 교수가 맡고 있었다.
3월 하순 어느날 오랑쥬 교수는 3편의 발표논문 요지를 보내면서, “이 3편의 논문은 한국 현대문학에 관한 것인데, 대표 질의자로 무슈장을 선정했으니 질의와 토론을 부탁한다.”고 했다. 4월 8일부터 12일까지 학회가 열렸다는 것도 덧붙였다.
발표요지는 모두 영어로 씌어져 있고, 발표자는 모두 동구권 학자들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뱌 대학의 오가렉 교수는 <나도향 소설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연구>, 체코슬라바키아 프라그대학 교수의 <한국 초창기 신극에 대한 연구>, 불가리아 소피아대학 교수의 <김석범(金錫範)의 칸조도(火山島) 연구> 등이었다.
영어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영어로 토론해야 할 것인데 나는 간단한 일상 회화정도는 할 수 있으나 토론은 힘들다고 생각되어 우선 질문할 요지를 영어로 적고, 현지에 가서 어떻게 처리해보려고 작정했다. <구라파 한국학회>의 공식발표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였다.
4월 8일 상띠유의 호텔에 도착해서 하룻밤 지낸 후, 이튿날 발표회장에서 우선 폴란드의 오가렉 교수를 찾아 어떤 언어로 질문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저는 프랑스어로 질의와 토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더니, 오가렉 교수는 “마, 그만 한국말로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동구권 여자들이 보이고 있는 훤칠한 키와 미모가 아닌 땅딸한 체구의 여교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유창한 한국말에 깜짝 놀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나중 알고 보니 그녀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서 10년 이상 생활한 사람이었다.
다음 체코슬라바키아 프라그대학 교수를 찾아 같은 물음을 했더니, 키가 크고 잘 생긴 그 교수도 “한국말로 합시다.”라고 하기에 안심을 했다. 마지막 소피아대학 교수는 영어밖에 못한다기에 영어로 토론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를 맡은 런던대학의 스킬랜드 교수가 한국말을 잘해서 그날의 토론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영어를 더 깊게 공부하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다.
<구라파 한국학회>발표는 알찬 성과를 남기고 끝났으며, 구라파 13개국에서 온 학자들과 미국, 중국, 한국에서 온 학자들은 일체감을 가지고 학문이상으로 인간관계도 돈독해졌다.
거기서 만난 한성대 이석주 교수가 살고 있는 영국의 런던대학 인터내셔널 홀에 체류하면서 대영박물관, 회화관, 원저궁, 케임브리지 대학, 옥스퍼드 대학, <찰스 디킨즈의 집>, <세익스피어 기념관> 등을 두루 관광했다. 좋은 친구를 만나서 아주 싼 비용으로 영국을 관광을 하게 된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3월 중순경 이태리에서 만난 캐나다의 김건수 씨로부터 편지가 왔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나의 외동생 손성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전해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손성호에게 연락하니 너무 반가워하면서 귀국할 때는 꼭 캐나다를 경유해서 가라고 신신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