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이란 세월을 신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드디어 1974년 7월 3일 전주 중앙성당에 김재덕 교주님으로부터 서품을 받았다. 교수 수품 동기는 정승현(요셉) 신부, 박종근(안드레아) 신부 그리고 서석구(사도 요한) 신부다.
사제서품 때 자기의 삶의 모토로 생각하며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상본에 새겨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나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인 ‘밀알 하나가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성구를 선택했다. 이 성서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깅용석 시인의 <가을이 오면>이란 시가 생각나서 아래에 소개한다.
가을이 오면
김용석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을 꿀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낸답니다
그러나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에요
가을이 오면
사제 첫걸음
서품 후 나는 중앙성당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본당 신부는 이대권(바오로) 신부였다. 6개월 간 보좌신부로 있는 동안 신부로서의 새로운 세계를 체험했다. 성무활동으로 미사와 강론, 고백성사 여러 가지를 체험했다.
당시는 고백성사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주일날 고백소에 들어가면 1-2시간은 보통이었다. 지금과 같이 시설이 잘된 것도 아니라 여름엔 어려움이 많았다.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고백소 밖에 긴 줄만 보면 겁이 났다. 이때 고백성사에 콤플렉스가 생겼다. 그러나 고백소에서 화를 내거나 소홀히 대한 적은 없다. 고백소에서 화를 내지 않고 신부생활을 마지막 성인신부라고 말한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나에게는 지침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고백소에 줄 서는 일이 없다. 죄인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까? 아쉬움이 남는다.
초등부와 중고등부의 많은 학생들이 미사에 참례했고 교리교사들도 열심이 봉사해 주었다. 사제관에서 인생 상담을 하며 젊은이들과 밤을 새우던 추억이 남아있다. 나는 현관 정문에 이런 글을 써 붙였다.
‘고민 있는 사람은 여기에 와 함께 고민을 풀고, 고민 없는 사람은 그 비결을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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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 중앙성당에서 김재덕 주교로부터 미사 때 사용할 성작 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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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젊은이들이 사제관 응접실에서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듣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12시 사이렌 소리가 왜 그렇게 아쉬웠는지 모른다. 나는 응접실을 그들에게 내주고 침실로 가는 때가 많았다.
본당 신부의 술친구
본당 신부와 특별히 추억이 있다. 본당 이대권(바오로) 신부님은 약주를 좋아하셔서 저녁 10시쯤 되면 인터폰 소리가 울린다.
“서 신부 출출할 텐데 술 한 잔 하게. 내 방으로 내려와.”
내려가 보면 술 안주와 고급 양주병이 놓여 있어 그 유혹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젊은 나이라 싫지는 않았지만 본당 신부님의 술 주량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정이 넘으면 사양했지만 본당 신부님은 나를 보고 젊은 나이에 운운 하시면서 계속 마시기를 바라셨다.
그때마다 “신부님 제가 아침 미사이기 때문에 그만 마시겠습니다.” 하면 “아침미사는 내가 할 테니까 걱정마.” 하시면서 대작을 즐기셨다. 그리고 정말 아침미사를 해주셨다. 그 후로는 신부님과 대작을 몇 차례 했지만 아침 미사는 내가 챙겨 신부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신부님의 밤샘 대작은 아무도 못 말리는 것이었다. 내 후배 보좌신부들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조용할 날이 없었던 유신독재 시절
유신군사독재시절이서 중앙성당에서는 매주 시국기도회가 있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때에는 주교님을 비롯해서 교구신부 전체가 유신정권에 맞서 국민들을 대변해 유신의 부당성을 세상에 고발하며 중앙성당에서 전동성당까지 거리시위도 했다.
이때 시민들도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 교구 신부 대다수가 5일간 교구청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중앙성당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잔심부름 하느라고 고생께나 했다. 지학순 주교님이 중앙성당에서 시국기도회 초청 강사로 왔을 때 성직자뿐 아니라 시민들도 많이 참석해 성당 안팎을 가득 메웠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긴장된 시기였다. 그러나 젊음은 유신독재가 두렵지 않았다. 젊음, 그것은 총칼보다 더 무서운 힘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