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만 앞서고 경험이 없을 때
나는 1974년 7월 3일에 성품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중앙성당에서 6개월 간의 보좌신부 생활을 거쳐 75년 2월에 진안성당의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진안성당은 시골이지만 그 당시 신자 수는 교구 본당 중에서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진안은 내가 살던 고향 장수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낮설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 본당신부로 부임하고 보니 기쁘기도 하고, 젊은 기분 그대로 의욕도 대단했다. 농촌본당이라 신자들 대부분이 부유하진 못했지만 순수하고 열심한 신자들이었다.
당시 70년대 유신군사독재 하의 시국은 항상 긴장되었고, 신부들은 정보원들에게 있어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젋고 패기에 넘쳐 무서울 것이 없었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 불살라버리고도 남을만한 대단한 각오로 살았다.
사람들의 의식도 깨우쳐서 무엇인가 세상을 변화시켜야겠다
공소회장을 소집했지만 와야 할 공소회장들이 오질 않아
의욕만 가지고 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알게 해준 첫 번째 경험
그때 나는 신자들에게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강론 때는 유신헌법의 부당함을 설명했고, 무효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교구에서뿐만 아니라 전국 기도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이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때는 정말 신부가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와 비례하여 만만치 않은 대우도 받았다.
이렇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의욕적으로 동분서주할 때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이런 일일수록 나 혼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의식도 깨우쳐서 무엇인가 세상을 변화시켜야겠다고 결심하고 먼저 공소회장을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강사는 전주에서 신부님을 모시기로 하였다. 공문을 띄우고 전화를 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렇게 교육날짜가 돌아왔다. 날씨도 좋고 손님 신부님도 일찍 오셨다. 그런데 막상 와야 할 공소회장들이 오질 않는 것이었다. 예상대로라면 40명이 넘어야 하는데 절반 정도인 20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의욕을 가지고 하는 일이 이런 결과가 되고 보니 허탈하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였다. 혹시 연락이 잘못되었는가? 무슨 오해가 있었는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무장을 시켜 확인을 해보았으나 준비에는 하자가 없었다.
내 딴에는 자랑도 하고 싶었고, 무엇인가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했었는데,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적으로는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경과한 후 참석한 공소회장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다가 내 성질을 못 이겨 그냥 울러버리고 말았다.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공소회장들과 손님 신부님이 당황해 하였고, 나도 그렇게 하고보니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 동석한 공소회장들과의 하루교육은 잘 끝났다. 교육이 끝나고 선배 신부님이 나를 위로해주었다.
신부로 한 평생을 지내다보면 자기 뜻대로 안따라 줄 때 실망도 되고 좌절감도 맛보게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당신은 기막힌 사연이 하도 많아 지금은 편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면서, 오늘 오지 못한 사람들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참석한 사람들에게 고맙게 생각하라며 위로해주셨다.
사람의 일이 이렇게 의욕만 가지고 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알게 해준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의욕과 정열도 없는 것 같다. 그때가 가장 풋풋한 시절이었다고 생각되어 그리워진다.
교육을 끝내고 그 뒤에 사연을 알아보았더니, 본당에서 교육이 있다는 정보를 경찰서에서 미리 알아차리고 공소회장들이 나오는 길목을 원천봉쇄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공소회장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오히려 그 후에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위로해주었다.
이제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젊었을 때의 순수함을 볼 수 있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지금 보좌신부로 있는 젊은 신부들, 그리고 처음으로 부임해서 의욕적으로 사목하고 있는 후배 신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젊음은 그 자체가 보배로운 자산이다.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힘차게 살아주기를 바란다. 사목생활이 잘 안 풀리고 머리가 아플 때는 선배 신부님들에게 좋은 충고도 청해듣기 바란다.
지혜는 학문이 아닌 삶의 체험 속에서만 얻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지혜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