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도 잘 이용하면 득이 된다...

할머니의 소원

내가 사목하고 있는 우전성당은 다른 성당에 비해 노인들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미사 때는 아침잠이 없으신 할머니들이 많이 나오신다.

그러다보니 평일미사 강론 때는 할머니들 알아듣기 쉽도록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고부간의 갈등이라든지 노후의 건강, 그리고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해 자주 들려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서적으로 빨리 공감을 느끼고 좋아들 하신다.

“우리 신부님은 우리들을 이해하고 계신단 말이야. 서 신부님은 쉬운 말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알라듣기 쉽게 이야기해주시니 참 좋단 말이여.” 등 당신네들끼리 하는 말을 지나가면서 귀동냥으로 여러 번 들었다.

하루는 장례미사를 마치고 영구차를 보내고 난 뒤 성당 마당에 서 있는데, 저쪽에서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다가 내 앞에 다가와 “신부님, 나도 죽을 때 신부님이 장례미사를 해주면 좋겠어요.”하시는 것이다. 신부님 계실 때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면서, 당신이 죽으면 나에게 연락하여 장례미사를 청할 테니 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럼요, 해드려야죠.”하고 약속해버렸다. 하지만 방에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무심코 대답을 해버렸지만 그분은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죽을 때 장례미사를 미리 예약해두시다니.......

내가 이 본당을 떠나면 그 약속을 지킬 수도 없으면서 쉽게 약속을 해버렸으니 난감한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제발 그 약속이 농담이었기를 바라지만, 말씀 하실 때의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해서 그 분에게 다시 물러 볼 수도 없다.

죽고 삶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고,

죽음은 결코 없어지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 삶의 자리로 옮겨 사는 것

그런데 그분은 매일 아침 미사 때 맨 앞자리에 앉으셔서 미사에 참례하고 계신다. 그리고 미사가 끝나고 정문에서 잘 가시라는 인사를 할 때면 내 앞으로 와서 어린아이처럼 손을 잡아주고 가신다. 간혹 바쁜 일 때문에 인사 없이 사제관에 그냥 들어갈 때면 신부님 어디 편찮으시냐면서 전화를 주시는 자상하신 분이다.

할머니는 성당에 오시면 항상 행복해하신다. 왜냐하면 우전성당은 시설이 잘된 영안실이 있어서 노인들이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죽으면 이 영안실에 눕게 될 것이고, 또한 본당신자들이 많은 기도를 해줄 것이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잘 대접해서 가정에 후덕한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엄숙한 장례미사에서 장지까지 본당에서 잘 보살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미사 때면 많은 어르신들이 참여하여 기도를 해주신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

나는 장례미사 강론 때마다 사람의 죽고 삶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고, 죽음은 결코 없어지거나 허무하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 삶의 자리로 옮겨 사는 것이라고 항상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 앞에 슬픔도 있지만 영원한 생명의 희망도 있으니 기쁘게 보내드리자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본당 노인 어르신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준비가 다 되어 있는 편이다.

사람의 생과 사는 본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올 때도 그렇고 갈 때도 그렇다. 그러나 생과 사는 인간사에 있어서 대사이다. 그래서 탄생할 때 축하해주고, 죽을 때 엄숙하게 장례를 치러준다. 특히 마지막 삶을 마무리하고 떠나는 장례는 정성을 다해 거두어주어야 한다.

할머니께 약속한 장례 미사는 약속할 수 없지만 소식 들으면 연령미사 한번은 꼭 기약해드리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신부는 행복합니다. 할머니들의 우상(?)이니까요.

자존심도 잘 이용하면 득이 된다

우리나라 이민역사의 시작은 하와이 옥수수농장으로의 농업이민이라고 생각된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들어왔고, 미군과의 국제 결혼으로 인한 그 가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낙후와 사회혼란으로 살길을 찾아 이민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다음으로는 유학생이나 상사 직원, 그리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투자 이민과 자녀교육 문제로 인한 이민이 70년대의 부흥을 이루었다. 그때는 이민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행운으로까지 생각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큰 희망을 가지고 떠나갔지만,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적응하지 못해 많은 시련도 겪는다.

특히 그 당시 지참금도 없이 몸 하나만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의 고생은 말할 수도 없었다 한다. 낮 설고 물 설은 먼 이국땅에서 모든 것이 생소한 그들에게는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는가?

이민 초기에 가진 것 없이 떠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집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또한 언어와 풍습이 다르고 소수 민족의 인종차별로 인한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 그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한 고집으로 남보다 열심히 일한 결과, 5~10년 이내에 남의 집 고용살이에서 벗어나 본인의 가계를 가지게 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보면 한국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다고 놀려댈 만큼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로 다른 소수민족보다 가장 먼저 자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국민성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자립하고 나면 이제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좋은 집과 고급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이민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소수 민족의 차별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은 모습의 외적 과시를 통한 자기 실현에서 대리 만족을 얻고자 하는 심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 이민자들이 미국사람보다 수입에 비해서 소비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국성당은 미국사회의 중산층이 대부분으로, 흑인들은 거의 없고 백인들만 다니는 성당이었다. 우리는 이 성당을 1주일에 2시간씩 빌려 사용하고 있었고, 1개월에500불을 지불하고 있었다. 미국 사회는 공과 사가 분명한 곳이기 때문에 공짜는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본당 신부가 성당사용료를 100%올려달라는 것이었다. 너무 무리한 요구 같아 본당신부를 설득해 보았으나 불가능했다.

본당신부는 나보고 잠깐 주차장으로 가보자고 하였다. 따라가 보았더니 미국 신자들 자동차보다 우리 신자들의 차가 더 고급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대형차였다. 내가 보기에도 더 이상 변명할 말이 없었다. 또 한 가지. 미국 본당 주일미사 헌금보다 우리 신자들이 내는 헌금이 더 많은 것도 알고 있었다.

미국사람들은 매사에 합리적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한국사람들은 집은 거주로 생각하기보다는 부의 상징이나 재산축적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그때 나도 본당신부보다 더 좋은 고급차를 타고 다녔으니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더부살이가 주인보다 더큰 과욕을 부리는 주책을 부렸던 것이다. ‘큰 코’앞에서 ‘작은 코’가 더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 일을 주일미사 때 신자들에게 말했더니, 소수민족 자존심 상한다고 하면서 이 기회에 사제관과 성당을 구입해 독립하자고 흥분하였다.

그 뒤 먼저 사제관을 구입해나갔고, 그 다음 신부 때는 성당도 구입해서 독립성당을 가지게 되었다. 약간의 자존심 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모두들 성전건립 헌금을 본격적으로 내게 되었고, 주일헌금도 훨씬 많아졌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나는 단독사제관을 구입하여 편히 살다가 귀국하게 되었지만 그때 신자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10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때 그 신자들과 고생했던 지난날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이 지면을 통해 힘들 때 함께 했던 신자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 모든 교포들에게 열심히 살아주시라는 격려의 말씀도 전하고 싶습니다. 힘들 때 도와주었던 모든 분들께도 이 자리를 통해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