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장모님의 도움 (5회)
  제1장 가족이라는 울타리

나는 신학교 2학년 때인 1966년 10월 24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2학년이라고 하나, 27살이었으니 늦은 결혼이었다.
 
고향에서는 군대를 제대하면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버지는 내가 빨리 결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느라 아버지의 말씀을 흘려들었다. 그렇지만 화가 난 아버지가 몸져 누워버리자 결국 더는 귀를 막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픈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고향 집에 내려가봐야 했다. 

그런데 집에서는 이미 옆 동네에 맞선 볼 사람까지 다 이야기를 해둔 상태였다. 교회의 목사에게 중신을 부탁해 성가대 반주자인 아가씨를 물색해놓은 것이다. 당시는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따로 앉았는데, 가운데 자리에 앉으면 반주자가 잘 보인다는 귀띔도 미리 받았다. 그렇게 멀리서 보고 난 뒤 중신아비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논은 얼마나 가지고 올수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방도가 생기겠다 싶었다. 
“우리 집은 제가 가져갈 논이 한 마지기도 없는데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중신아비가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안 되겠는 걸.”

집에 돌아가자 아버지가 반색하며 나를 맞았다. 

“그래 아가씨는 어떻더냐? 중신아비는 뭐라고 하고?”
“논을 적게 준다고 안 된다고 하던데요.”
“무슨 그런 소리를...... 내가 그 집 사정을 잘 아는데. 우리집 보다 가세가 넉넉하지 않으면서 논을 적게 줘서 안 된다는 소리를 해!”

아버지는 화가 나서 더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돌아누워 버렸다. 그 후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고 1학년 때 그 아가씨 측에서 연락을 해왔다. 그 교회 전도사를 통해 물어온 건데, 다시 생각해볼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 없다. 나는 결혼할 생각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아내 이은자를 만난 것은 서울로 올라와 한영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교대를 다니고 있던 아내는 처음에 내가 고등학생인 줄 몰랐다. 그때는 4.19이후라서 고등학생도 머리를 기르고 다닐 수 있었다. 또 당시는 세탁소에서 옷을 빌려줬는데, 학교에 갈 때만 교복을 입고 주로 빌린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고등학생인 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고등학생 치고는 나이가 제법 많았다.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마장동에 있는 아내의 집이었다. 한동안 서소문에서 살던 장인어른은 직장 때문에 마장동으로 이사를 왔다. 교직원으로 몸담고 있는 한양대가 있는 마장동에 집을 얻은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집의 방 한 칸을 빌려 자취를 했다. 

아내는 1945년 중국 길림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함흥을 거쳐 서울로 내려온 뒤 서소문에서 살았다. 이후 한국정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을 간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돌아와 남대문초등학교, 이화여중, 이화여고를 나온 뒤 서울교대에 진학했다. 

장인어른인 이광수 장로는 서소문교회의 창립멤버였다. 서소문 교회가 있는 자리는 예전에 피난 온 함경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모여 살던 곳이었다. 당시는 한경직 목사가 일본 천리교 경성 제1교회 자리에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를 짓고, 송창근 목사가 동자동 천리교 본부 회당에 바울교회(현 경동교회)를 지을 때였다. 서소문교회가 세워진 곳도 일본 신당이 있던 자리였다. 
 
▲ 장모 이영순(오른쪽)

장인어른은 서소문교회의 초대 목사인 김동철 목사를 비롯해 몇몇 장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서소문동 75번지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기로 했다. 장인어른은 한국전쟁 때 김동철 목사가 납북된 후 부임한 서금찬 목사와 함께 서소문교회를 건축하면서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건축과정에서 한 장로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를 모양이었다. 당시 혈압이 높았던 장인어른은 그 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쓰려졌는데, 그 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내가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다행히 장모님인 이영순 권사는 오래 사셨다. 장모님은 젊었을 때 일찍 남편을 보내고 나서 평생을 혼자 사셨다. 나는 자주 두 분 어머니의 기도로 살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어머니와 더불어 장모님의 기도를 많이 받았다. 신세도 많이 졌는데, 특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우리 아이들을 모두 키워주셨다. 

아이들이 한창 어릴 때, 나는 늘 집을 떠나 있어서 가정을 돌보지 못했고, 아내는 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우고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학교일에 전념해야 했다 장모님은 딸과 외손주들, 그리고 사위인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사셨다. 더욱이 사위가 감옥을 들락거리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속으로 삭이면서 사셨을 것이다. 

장모님은 말년에 혼자 사셨는데, 아무리 같이 살자고 해도 막무가내셨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거동이 볼편해지자 아내가 옆에서 수발을 도왔다. 그런데 5일째 되는 날, 아내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막내처남이 장모님을 모시고 갔다. 

막내처남은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 장모님을 모셨는데, 장모님도 편하고 좋다며 만족해하셨다. 그런데 일주일쯤 뒤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은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내에게 먼저 말을 하고 병원에 갈까, 아니면 병원으로 가자고 할까를 고민하다가 그래도 알고 가는 게 좋겠다고  싶어 아내를 불렀다.,

“당신, 놀라지마. 장모님이 돌아가셨대.”

그러자 아내가 갑자기 픽하고 쓰러졌다. 다급한 마음에 119를 불렀는데, 다행히 구급차가 도착할 무렵 아내가 깨어났다. 또 쇼크가 올지 몰라 구급차를 타고 성모병원에 갔고, 수지에 살던 막내처남은 요양원에서 장모님의 시신을 모시고 성모병원으로 왔다. 

장모님은 내가 예상한대로 기도가 막혀 돌아가신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침대에 곧바로 누운 것이 원인이었다. 한평생 홀로 깨끗하고 정갈하게 사신 장모님은 2013년 7월 13일 100세로 운명하셨다. 

나와 우리 가족은 그 분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오늘날 우리 가족이 격동의 시대를 보내고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장모님의 기도와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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