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는 참새 같은 본능으로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신탁이면 어떻고 반탁이면 어떠냐? 문제는 어느 한쪽에 민족의 뜻이 모아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신탁통치 안을 내놓은 미소양국의 진의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탁통치라는 함정을 파 놓고 거기에 우리 민족이 어떻게 걸려드는가를 관찰하고 어떤 먹을거리가 생기는지 관찰하고 있었다고 할까?
신탁통치란 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최상의 방법이라고 외치던 북쪽에서 먼저 정부가 수립되고 남쪽도 따라서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괴뢰정부라고 외쳤다.
북과 남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은 민족의 뜻은 아니요, 민족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의 제의에 의해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졌을 때 미소양국 사이에 암암리에 양해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내놓고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신탁통치라는 명분과 미끼를 우리 민족에게 던진 것인데 우리는 그들이 바라던 대로 분열과 대립에 남북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명분과 상황을 제공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한 상황이었지만, 하여튼 우리는 반탁이 옳은지 신탁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옳든 그르든 온 민족이 하나만을 선택해야 사는 길이라는 것이 석두의 생각이었다. 온 민족이 한 목소리롤 반탁을 외친다면 혼란을 각오하고 총선거가 단시일에 실시되어 하나의 국가의 틀이 만들어질 것이고, 모두가 신탁을 외친다면 신탁통치 기간이 끝난 연후로 모든 절차가 연기되는 것이니 좀 더 시간을 벌어서 안 될 것 없다.
조선시대, 우리의 조상들이 왕이나 왕비의 상을 일년상으로 하느냐, 삼년상으로 하느냐를 두고 싸움질을 하고, 사약을 내리고, 유배를 시켰다는데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두고 극한적 대립을 하는 것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년상도 좋고, 삼년상도 좋다. 찬탁도 좋고, 반탁도 좋다. 당신들 정치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할테니까 당신들이 정하면 된다. 제발 우리를 분열시키고 편싸움에 끌어들이지 말아 달라,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정치(政治)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이승만 박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를 열심히 외쳤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뭉쳐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아전인수의 논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이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고 서로를 투쟁의 대상으로 인지하고 적과 우리의 편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이럴 때 힘을 발휘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물리적인 힘이라고 할까? 군사적 힘이다.
북쪽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비하여 소련의 지원 아래 군사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남쪽은 사정이 달랐다. 미국은 새로이 수립된 정권에 행정을 이양하고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경찰력을 키워주는 게 고작이었다.
국방군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된 군대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데다가 남로당의 프락치가 여기저기에서 봉기함으로써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쳐들어오는 것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김구 선생이 서북청년 출신의 애국적 지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서와 같은 시를 쓰고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만난 것은 역시 애국적 충정에서였다. 김구 선생은 김일성을 만나서 정치적 흥정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남북이 군사적 충돌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김구 선생으로서는 ‘군사적 충돌에 의한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 선생을 극진히 대접했으나 이미 그때 남침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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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북 길의 김구 일행 (1948년 4월 19일 38선에 도착한 모습이다) /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건곤일척으로서 김규식과 방북하여 김일성과 연석회의를 열어 남북 총선거를 실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로 말미암아 수난을 겪어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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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는 달리 이승만 박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믿지 않았다. ‘미국이 마샬라인이다 뭐다 해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어 라인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이 절대로 한반도를 송두리째 내놓을 리가 없다. 한반도가 자본주의 국가세력과 공산주의 국가 세력의 절충선상에 있을지 모르지만 원래 절충지대란 서로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를 포기할 리가 없다. 북조선이 군사행동을 개시한다면 맥아더 장군의 군대가 가만히 있겠는가.
이승만 박사는 북조선의, 군사적 침공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남한에서의 적색분자의 책동과 소요사태에 의한 국가전복을 걱정했다. 그래서 반공법을 만들고, 남로당에 끈이 닿아 있는 적색분자를 색출하고, 조봉암 같은 사회주의자이면서 이승만 정권에 협조한 정치인도 가차 없이 처단했다.
석두는 그러한 것이 불만이었다. 어떤 정치이념이나 사상을 반대하는 반공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더 옹호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본질을 비교해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경제구조와 정치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홍보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더 있어야 했다.
남로당 극렬분자의 책동에서 국가의 틀을 지키기 위하여 반공법은 불가피했고, ‘뭉치면 산다.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옳은 말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설득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이승만 박사는 공백상태의 행정력을 메우고 좌익세력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일제시대의 협력자, 관리, 고등계 형사들을 재등용 시키고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의 침략과 야만을 규탄해온 골수 반일투사인 이승만 박사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었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승만 박사는 일제시대 반민족적 친일을 처단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반민족특위를 해산시키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서는 나라의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장 절대 필요한 사람들이 대부분 특위의 처단 명단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북조선에서도 처음에는 친일반역자를 처단하지 않았다. 행정의 공백을 메우고, 공장의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억류해서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일본의 전문가와 기술자는 충분히 대접하고 이용하여 어느 정도의 틀이 잡힌 뒤 일본에 귀화시켰으며, 친일파라 하더라도 이용가치가 있는 자는 충분히 이용하고, 서서히 그러나 철저히 처단했다.
일제의 잔재세력을 철저히 이용하고 숙청했다. 말하자면 일제 잔재와의 싸움에서 실용주의(實用主義) 면을 가미했다고 볼 수 있다. 이용을 하고 처벌을 한다는 것은 개를 길러서 잡아먹는 것과 같다. 당한 사람으로서는 분하고 억울했지만 북쪽 당국은 냉혹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로서는 친일반역자에게 냉혹할 수 없었고, 오직 좌익분자에게만 철저히 냉혹했다,
조봉암(曺奉巖)의 사형집행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나라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이 박사는 판단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