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체다방 (9회)

고등학교(중학교 6년제)를 갓 졸업한 석두에게는 세계정세가 얽히고 설켜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유단자들이 바둑을 두는데 18급의 초보자가 관전을 하구 수를 읽으려니 그저 괴롭고 당혹스러울 뿐인 것이다.

이튿날 아침 서홍이 찾아왔다. 그는 H대학의 2학년 수료증을 들고 찾아왔다. 우리는 H대학의 교문을 들어선 적도 없으니 물론 위조된 수료증이었다.

“이걸로 신문학원 시험을 치는 거다.”

“가짜로 어떻게..... 위조라는 게 금방 들통 날 텐데......”

“이 세상에서 가짜 아닌 게 어디 있냐? 이건 진짜 같은 가짜야. 네 것과 내 것, 두 통에 만원 줬으니까. 오천 원만 있으면 내놔.”

석두는 그래도 찜찜한 표정이었다.

“야, 위조도 할 만한 사람이 하면 되는 거야. 서류야 형식이고 시험은 당당히 지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니?”

두 사람은 그날로 청계천 3가에 있는 신문학원에 찾아가 입학원서를 냈다. 서홍과 석두는 젊은 생각에 신문기자가 다된 기분이었고, 신문기자가 되면 어떤 세상이 오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신문학원을 나와 명동으로 걸어갔다. 돌체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고 오랜만에 클래식 음악을 듣자는 것이다. 중앙극장 앞을 지나가 명동성당 쪽으로 걸어가는데 “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돌아다보니 신태호가 서 있었다.

서홍과 석두의 같은 클래스이며 구맥회의 동인으로 2조 급장이었던 신태호는 지난 4월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에 합격을 했다. 돌체까지 갈 것 없다. 가까이 있는 다방에 들어가자. 오랜만에 얘기나 하자 해서 세 사람은 성당 오르막길에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문리대 정치과는 최고의 수재들만 간다는데 축하한다.”

서홍이 입을 열었다.

“네가 정치과에 갈 줄은 몰랐어.......”

석두가 말하자

“그럼......?”

“정치과가 아닌, 법대나 공대...... 너 같은 수재들이 가는, 정치과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석두는 2년 전에 독서회 조직에 참가하라고 권유하자 결석하고 시골집으로 달아난 태호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야. 정치에 관심이 커. 정치를 이론적으로 파고들고 싶어. 현실적인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이론적으로 파고들면 넓은 학문의 세계가 있을 것 같아.......”

신태호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빨리 하숙집에 돌아가야 한다. 대학강의를 제대로 수강하려면 사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둘의 눈에는 신태호가 그지없이 착실한 대학생일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숙맥으로 느껴졌다.

▲ 1950년 명동 중앙극장 앞 광경 [출처 ; 국가기록원]

석두와 서홍은 돌체에 가서 담배 연기와 음악적 분위기 속에서 미래의 신문기자상을 그리며 상상의 날개를 폈다.

석두와 서홍이 시간만 있으면 명동의 돌체다방에 들른 것은 클래식 음악을 듣고 그럴싸한 분위기에 젖음으로써 불안한 젊음의 갈등에서 도피하려는 데도 있었지만, 돌체에 가면 젊은 예술인들, 특히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대, 언세대, 중앙대 등의 대학 극 서클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연극에 대해서 순수한 정열을 불태우고 대화와 논쟁을 일삼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역시 좌와 우로 갈려 있었다. 중앙대와 서울대는 색깔이 뚜렷치 않은 회색이었다면 고려대와 이화여대 주변은 좌우가 분명히 갈라져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다만 좌파적 성향의 선배들은 그들의 성향이 노출되면 신변이 위험하므로 위장된 연기를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박로경(朴魯慶)이 주재하는 ‘여인소극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화여대 연극반은 진보적 성향으로 여인 소극장의 동인으로 참여한 여대생도 있었다. 반면 월남한 선배들이 주축이 된 고려대는 우파적 성향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날도 한구석에 대학 극 서클의 선배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고려대의 최 선배, 김 선배, 서울대의 조 선배, 정 선배, 이화여대의 이 선배, 그들은 석두에게 선배라기보다 스승에 가까웠다.

그들은 대학 극 서클에서 독서회 등으로 연극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동시에 기성극단(신협과 극협, 여인소극장 등)에 이미 참여해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따라 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뭔가 불안한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북조선 평화공세를 얘기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전쟁은 피해야 한다, 그러니 북조선의 평화회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월남해온 최 형과 조 형은 다 북조선에서 겪어봤는데 그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단호하게 뭔가를 주장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들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석두와 서홍은 돌체의 이런 분위기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서둘러 돌체를 나왔다. 앞으로를 대비해서 신문학원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