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戰勢)는 북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한강다리가 폭파되고 며칠 동안은 한강 도강을 주저하는 듯 했으나, 도강을 감행하자 그 다음은 파적지세로 대전까지 내려왔다.
대전에서는 미군 24단장이자 군정장관이었던 딘 소장이 포로가 되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의도적으로 포로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대목이 없지 않지만 그만치 미국의 대응은 어수룩했다고 할 수 있다.
인민군은 대전에서 다시 머뭇거렸다. 서울만 점령하면 전국에 남로당계의 봉기가 일어나서 이승만 정권은 저절로 무너진다고 장담한 박헌영의 주장을 확인해보려는 듯 인민군은 두 번 머뭇거렸다. 서울과 대전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왔으나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로 정부가 내려간 것을 보면 호남은 그대로 인민군에게 내 주는 것 같았다. 인민군이 한강을 도강한지 일주일도 안 되어 광주의 상무대 등 군사시설이 철수를 시작했고 이어서 관공서, 경찰서 등이 황급히 철수했다. 적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교전 한번 없이 모두 철수해버린 것이다.
며칠간의 공백상태가 이어졌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공백상태는 무엇이 되었건 하루 빨리 메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막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인민군 차량이 노령산맥에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넘어왔다. 헤드라이트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아무런 저항이 없는 호남에 진격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인민군 사령부는 망설였으나 결국 정면 돌파와 측면공격을 병행한다는 작전명령이 떨어진 듯 인민군 주력부대의 하나가 호남평야를 진격해서 노령산맥을 넘어 전남에 진격한 것이다.
그들은 트럭과 독일군이나 소련군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병사가 운전하고, 다른 병사는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사격을 하는 2인승 오토바이를 타고 노령산맥을 넘어왔다. 그들은 우리 국방군에 비해서 월등하게 잘 무장되고 멋있어 보였다. ‘이건 상대가 안 되는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군이 노령산맥을 넘어 전남에 진주해온 이튿날, 서홍과 석두는 광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노령산맥의 외딴 마을을 나와 국도 1번을 따라 약 백리 길을 가면 광주이다. 인민군이 진주하면 어떻든 치안이 잡힐 거고 그러면 시골보다는 광주가 더 안전하며, 좌익으로 몰려 숨어있던 친구들도 만날 거고, 하여튼 광주로 가기로 해서 아침 열 시 경에 출발했다.
마을을 나오는데 외할머니가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셨다. 외할머니는 며칠 더 있다가 가라는데, 당장 광주에 가야 한다는 손자가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셨다. 마을 어귀에서 외할머니는 되돌아가셔야 했다.
석두는 소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자기를 길러주신 외할머니에게 무척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 고갯길을 넘어서려 하는데, 흔히 사람들이 호주댁(이 대통령 부인을 가리킴)비행기라고 생각했던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석두와 서홍은 혹시 자기들을 향하여 기총사격을 해올까 봐 잽싸게 몸을 날려서 제방 뒤로 숨었다. 그러나 제트기는 두 사람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마을 위로 한두 번 선회하더니 마을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석두는 혹시 외할머니가 다치지 않았을까 마을에 되돌아가보고 싶었다.
‘무사하실 거야. 인민군이 숨어있을까 봐 기총사격을 한번 해보는 거야.’
|
|
| ▲ 6.25 당시 호주 공군기 미터기 / 무분별하게 민간인에게도 공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석두는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뒤돌아보면 1번 국도를 향해 걸어갔다.
기총사격을 가하려면 인민군이 노령산맥을 넘어올 때 할 일이지 마치 직장에 출근하듯이 아침 열시쯤 나타나서 쓸데없이 이곳저곳 기총사격을 가하다가 오후 다섯 시만 되면 퇴근하듯이 사라지는 제트기, 속칭 호주댁 비행기가 도대체 누구의 명령으로 어떤 작전지시를 받고 나타나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인민군을 공격한다기 보다는 인민군이 진주했는가 안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날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번 국도를 따라 걸어오다 백양사 입구를 지나치려 하자 무장한 한 청년이 나타나 두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며 손을 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손을 들고 대학생인데 서울에서 걸어오는 중이라고 했다. 무장한 청년은 산에서 내려온 유격대라고 했지만 경찰이 위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걸어 내려온 대학생이라고 하자 두 사람을 보내주고 그는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유격대 치고는 깨끗하게 너무 잘 입었지 않냐?”
하여튼 인민군이 들어왔으니 유격대를 자청해야 대접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구 읍내를 지나 장성으로 들어가자 완장을 두른 청년이 죽창을 들이댔다. 서울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자, 본부에 가자고 했다. 본부라는 게 군청 별관이 아닌가 싶었다.
죽창을 들이댄 청년은 시골청년이라면 본부에 앉아 있는 청년은 도시의 물을 먹은 청년이었다. 인민군이 들어오자 좌익성향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민병대 같은 성격의 조직 같았다. 의자에 앉아 폼을 잡고 있는 청년에게 대학생 신분증을 보이며 서울서 내려오는 길로 광주에 간다고 하자 고생했다고 하며 빨리 가보라고 했다. 그러자 죽창을 들이댄 청년이 이의를 달았다.
“이 사람들 서울서 오는 사람들 아니여. 서울서 걸어온 사람의 신발이 저렇게 멀쩡해....... 옷차림도 그렇고.......”
그러자 의자에 앉은 청년은 죽창을 든 청년에게 잔소리 말라고 제지하며 우리에게는 빨리 가라고 했다.
“신분이 확실한 분들이여. 여러 말 말어.”
그런 소리를 뒤로 하고 석두와 서홍은 서둘러 그들의 본부를 빠져나왔다. 숨어있다 나오는 거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쓸데없는 오해를 부를까봐 또 이것저것 설명하기 귀찮아서 서울서 걸어오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인데, 거짓말이 탄로 날 뻔 했다. 석두와 서홍은 마주보며 실소를 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가 귀찮을 뻔 했다.”
“기본계급과 사이비 중간치기의 차이일지 몰라. 기본계급은 경각심이 철저하다고......”
죽창을 든 청년은 노동자 또는 농민 출신의 기본계급이라면 의자에 앉은 청년은 공산주의나 좌익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끼어든 사이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는 우리도 저 친구와 같은 사이비라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할 지 걱정이었다. 서홍은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