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용서를 빌라고 하는데, 굥산주의는 당을 향해서 스스로의 잘못을 규탄하고 뉘우치고 당에의 충성심을 맹세하도록 강요하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를 믿거나 공산주의를 신봉하면 그날부터 우리는 자유를 상실하고 그날부터 속죄양이 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속죄양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종교는 현세가 아닌 저 세상에서의, 죽음 저편의 지옥 같은 설정 또는 가정해서 우리를 공갈치는가 하면, 공산주의는 현세에서의 무자비한 숙청을 내세워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석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이 채 못 되어 석두는 조직에서 이탈하기로 결심을 했다. 이틀째 민청에 안 나가자 서홍이 찾아왔다. 잘못하면 반동으로 몰리니 참고 시민청에 나가라는 것이다. 우리 같은 프티 부르주아 출신들이 극복해야 할 시련이자 과제라고 했다.
석두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좋지만 내가 하고 싶은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특히 문학에 뜻이 있고, 예술적 창조에 뜻이 있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조국이 통일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면 네가 말하는 자유도 누릴 수 있게 될 거야......”
“그럴 것 같지 않아. 환상이야. 매일아침 자아비판을 하라는데 자유가 어디 있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공산주의를 하더라도 남쪽에서 올라가서 해야지 북쪽에서 내려와서 하는 건 곤란해. 그들이 우리를 심사하고 지시하고...... 박헌영 만세 불렀다고 몰아세우고.”
“네 생각은 위험한 사상이야. 영기도 네 걱정을 무척 하던데.”
서홍은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전영기가 찾아왔다. 영기는 1년 전에 월북한다고 찾아와서 석두의 하숙방에서 이틀을 보내고 간 세 친구 중의 한 사람이다. 세 사람은 월북하자 곧바로 남파 공작원 또는 유격대를 훈련하는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3개월 후에 오대산 방면의 유격대로 남파되었다.
그러나 정영기, 김용구, 이달재 세 사람 모두 토벌대에 의해 생포되었다. 이달재는 육군 형무소에서 수감되어 곧바로 충살되었고, 정영기와 김용구는 함평 유지이자 재력가인 정영기 부친의 구명운동으로 총살을 면하고 춘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용구는 영기의 덕을 본 셈이지만 달재는 6.25남침이 있기 전에 총살된 것이다.
영기와 용구는 춘천형무소에서 6.25를 맞이했고 일반 죄수와는 달리 끌려가 처형될 뻔 했는데 혼란을 틈타 탈출에 성공, 용구는 오대산 빨치산에 합류했고 영기는 그 길로 남하해서 광주로 온 것이다.
남하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광주에 온 것인데, 그도 역시 공작반의 심사를 받았는데 춘천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과정에 의문을 갖는 심사위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기는 심사원의 의구심을 풀어주고 충분히 해명함으로써 도당 간부가 되어 민정 담당 지도원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영기는 석두에게 당장 시민청에 복귀하라고 설득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을 등지고는 살 수가 없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도 당성은 있어야 한다. 신문기자가 되기 위해서도 당성은 있어야 하고 김일성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당원이 되어야 한다.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설득을 했다.
“네 말은 충분히 알아 들었어....... 하지만 시민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조국과 민족에 봉사하는데 다른 방법과 길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도민청으로 자리를 옮길래? 서울도 있고......”
“아니. 보다 자유롭게 혼자서 하는 일이 있다면......”
영기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그래 참 민청의 서울본부와 연락이 두절상태인데 네가 연락책으로 서울을 갔다 오면 어떠냐?”
석두는 서울을 갔다 오라는 말에 금방 마음이 동해서 일종의 연락병 같은 연락책을 맡기로 했다.
“좋은 자전거를 구해 줄테니 내일 당장 떠나라.”
석두는 광주를 떠나 서울에 가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조직의 임무를 수행한다기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국제정세는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전세(戰勢)는 어떤가? 많은 궁금한 일을 알아보고 온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영기의 호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튿날 아침 석두는 도민청에 가서 서울본부에 전달할 서류뭉치를 받고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다. 그동안 한 달여 일을 따분한 속에 숨어 있거나 갇혀 산 느낌이라면 자전거를 타고 서울을 간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모험에의 출발처럼 석두를 신나게 했다.
한양은 천리 길이라는데, 그동안 완행열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본 적이 있으나 자전거를 타고 서울을 가는 것은 새로운 체험이 될 것 같았다. 서울에 가면 의과대학을 다니는 형님을 만날 수 있고, 문학서클의 여학생들도 만날 수 있고...... 휘파람을 불며 자전거를 몰았다.
다만 광주 시내의 풍경이 한 달 전에 광주에 올라올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때때로 제트기가 나타나서 어딘가 특별히 목표로 삼지 않고 기총사격을 가하는가 하면 사람들의 표정도 어두워보였다. 활기찬 도시의 아침분위가 아니라 찌푸린 표정에 무거운 분위기였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 난리 속에 서울은 뭐하러 기어 가냐. 할일 없으면 할머니 집에 가 있지 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