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시내를 벗어나 1번 국도를 타고 비야면에 들어서려는데 따발총을 든 인민군 두 사람이 길을 가로막았다. 인민군은 장교와 사병 같았다. 자전거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석두는 민청의 중요한 연락 업무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자전거가 필요하면 인민위원회에 가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민청의 연락업무야 시간을 다투는 일이 아니지만 전선(戰線)의 정세는 일분일초가 급하다고 했다.
“동무는 조국을 위해 무엇이 더 급하다는 것을 모르오?”
그들은 자전거를 강탈하다시피 빼앗아 타고 사라졌다. 석두는 어이가 없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기를 가진 두 싸울 수 없고 끝끝내 자전거를 뺏기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면 사살을 하고라도 자전거를 빼앗아가겠다는 기세이니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석두는 인민군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져간 신작로를 바라봤다. 저 길을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왔는데 이제는 걸어서 돌아가야 하는가? 그렇다고 서울까지 걸어갈 수도 없고...... 결국 광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불과 한 달여 사이에 인민군 병사의 인상과 표정이 너무 달라졌다. 노령산맥을 넘어서 처음 진격해온 인민군은 질서정연하고 자신만만한 기개가 있었으나, 석두의 자전거를 빼앗아간 인민군은 신경질적이고 자포자기한 듯 패잔병은 아니지만 뭔가에 쫓기는 사람들로 느껴졌다.
그러나 저러나 광주로 돌아오는 석두의 발길은 무거웠다. 영기한테 뭐라고 보고한다? 사실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지...... 뚜벅뚜벅 걸어서 시내로 들어오는데 어떤 건물 앞에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내 자전거를 인민군에게 빼앗겼으니 저 자전거를 대신 빼앗으면 어떨까? 그러나 무슨 힘으로 뺏는단 말인가? 뺏을 수 없다면 훔치면 된다. 뺏는거나 훔치는 거나 매 일반이다.
석두는 이태리 영화 <자전거도둑>을 생각했다. 영화 속의 주인공에게는 자전거는 생존수단이었다. 생존수단인 자전거를 도둑맞고 자기도 자전거를 훔치려다가 실패하고 실망하는 실업자...... 그 영화의 주인공에 못지 않게 절실한 상황에 석두는 처해 있다고 생각되었다.
주저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러나 석두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실패하고 붙들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청년이 석두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내무서에 글려가나 했더니 내무서로 가지 않고 동명동의 주택가로 연행되었다. 석두를 연행한 사람은 정보원 같은 사람이고 끌려간 곳은 비밀경찰이나 첩보기관이라는 인상이었다.
제트기가 씽~ 하며 상공을 날았다. 정보원이 몸을 피하듯 크게 움직이자 사복을 입은 책임자 같은 사람이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제트기에 뭔가 인기척이 감지되면 뭔가 기총사격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소리친 것이다.
석두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나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석방되었다. 그날로 영기를 찾아가 보고하기에는 너무 맥 빠진다고 생각되어 루문동의 집에 일단 들어가고 내일 도민청으로 영기를 찾아갈 생각을 했다.
루문동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와 유형(柳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형님 친구인 유형은 형님과 같이 삼청동 집에 숨어 있다가 나흘 전에 서울을 출발해서 오늘 아침에 광주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너 여기서 자전거 뺏기기 참 잘했다. 서울 가면 의용군에 끌려가든지 굶어죽든지 양당 간이야...... 그리고 전쟁은 이미 결판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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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로수용소 안의 14세 북한군포로 [AP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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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보급로가 끊긴 인민군은 탄약이 바닥났고, 포탄을 병사들이 하나씩 짋어지고 전선으로 가는데 그래가지고 싸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엔군의 반격이 임박했는데, 인민군이 영락없이 올가미에 잡혔다는 것이다. 또 한 번 세상이 뒤집힐테니까 몸조심 하고 당분간 유형의 시골집에 가서 숨어있자고 했다. 어머니도 석두에게 제발 그러라고 타일렀다.
전쟁이라는 게 기세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인민군이 처음 들어올 때는 기세가 당당하고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느껴졌는데 두 달도 못되어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전세가 불리하니까 인민군의 작전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남쪽의 국방군과 미군은 패주하듯이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했지만 인민군은 유인해서 때가오면 반격을 가한다는 작전이었다.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인민군은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것이다. 차량이나 열차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야간인데 그나마 폭격으로 차량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연료가 바닥나서 운송수단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선(戰線)을 확대한 것도 잘못이고 보급소단이 없는데 너무 멀리 깊이 들어간 것도 잘못이었다.
김일성이 그러한 상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말하자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김일성은 최후의 결전을 시도해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낙동강 상류 영동지역에 인민군의 정예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첩보전과 정보전에 만만치 않은 미군은 그러한 기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인민군의 집결지에 B29에 의한 대대적 야간공습을 강행했다. 2차 대전 때 B29에 의한 동경 대공습은 그 엄청난 파괴력으로 유명하지만 그 대공습에 못지않은 B29의 대공습이 영동지역이나 낙동강변에 감행되었다.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하룻밤 사이에 붕괴했으며, 지리멸렬되었다.
이제 인민군으로서는 어떻게 세를 규합하여 후퇴하느냐 하는 과제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유형의 정보분석이었다.
“유형의 정보 분석은 그럴싸한데 정보의 특별한 소식통이 있나요?”
소식통이고 뭐고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정보라고 했다. 석두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유형을 따라서 유형 시골집에 가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되었다.
이튿날 아침 석두는 영기를 만나서 어제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영기는 석두가 예상한 것과 달리 담담히 듣고 있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한마디 했다. 그리고는 서울로 직접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독자적 판단으로 행동해야 할 것 같다며 매일 도민청에 한 번씩 들르고 긴급사태가 있으면 연락 할테니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석두는 그날 밤 유형을 따라 유형의 시골집으로 갔다. 도민청에 매일 들르라고 영기가 말했으나 서울 가는 일이 틀어졌는데 도민청에 가봐야 석두에게는 할일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석두는 이제 어느 쪽에도 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유형을 따라 유형의 시골집에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