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탈출, 산으로 (16회)

유형의 시골집에 있는 마을은 송정리에서 멀지 않을 곳이었으며 지극히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유형의 부친은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계셨다. 유형은 두 형님이 계신데 둘 다 타관에 계시고 어머니 혼자서 식모와 머슴을 데리고 살고 계셨다.

유형의 큰 형님이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했다고 하며 그래서 가산을 축내기도 했으나 토지개혁 등의 과정에서 소작인들에게 후하게 해주어서 세상이 바뀌어도 유형의 집을 해코지 하는 집이 없어서 편안하게 살고 계신다고 했다. 식모는 물론이지만 머슴도 예나 다름없이 유형 어머니를 잘 모셨다.

석두가 유형 집에 가 있는 동안 머슴은 매일같이 논두렁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아왔고, 유형 어머니는 그걸로 추어탕을 끓여주셨다. 석두는 여름 내내 예전에는 먹어보지 못한 보리밥을 먹었다. 보리밥이 방귀는 나오지만 속은 편안하다고 자위했지만 어쩐지 영양부족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매일같이 추어탕을 먹으니 영양보충을 톡톡히 한다고 생각되었다.

석두는 동란의 와중에 뜻밖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나날을 열흘쯤 보냈을까. 송정리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왔다는 유형이 빅뉴스를 가지고 왔다. 유엔군이 며칠 전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인민군은 혼란 속에 전면 퇴각을 하고 있으며 지역의 좌우세력과 조직은 입산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두는 이러한 급변과 난리 속에서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광주로 돌아가서 서홍도 만나고 어머니도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형은 “광주에 가더라도 그 애들을 따라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한마디 했다. 광주에 가서 어머니가 계시면 뵙고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석두는 광주를 향해서 걸어갔다. 광주로 가는 1번국도로 접어들자 엄청난 사람들이 흩어지기도 하고 대열을 짓기도 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광주 시내를 벗어나 북으로 가는 행렬 또한 산(山)으로 들어가려는 행렬로 느껴졌다. 점령했던 도시를 버리고 긴급 퇴각 또는 긴급 피신하는 행렬이었다.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는데 석두 혼자서 도시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힐끗힐끗 석두를 쳐다봤으나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그들 가운데는 인민군도 있고 일반복장의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북상하는 데는 매일같이 날아오는 쌕쌕이도 날아오지 않았다. 여기에 제트기가 날아와서 기통소사를 가한다면 대혼란이 일어날 텐데....... 쌕쌕이가 오늘은 봐주는 건가. 석두는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의 장면을 생각하며 이것도 전형적인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발길을 서두르는데 뒤에서 “동무는 어디로 가오?” 하고 한 인민군 병사가 따라왔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말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광주를 벗어나는 것이 의아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 병사는 어디를 갔다 오는지 모르지만 전세의 급격한 변화는 모르고 화순에 있는 부대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화순에 부대가 그대로 있을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했다. 그러나 석두는 혼자 반대 방향으로 거꾸로 걸어가는 것보다는 둘이서 걸어가니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우선 루문동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어머니가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며 루문동 집으로 가는데 인민군 병사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다. 십오륙 세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인민군 병사에게 화순으로 가려면 이 길을 쭉 따라가면 된다고 가르쳐 주어도 “네, 압니다.”하면서 인민군 병사는 루문동 집까지 석두를 따라왔다.

▲ 인천상륙 작전 당시 투항하는 인민군 소년병들

집에는 어머니가 와 계셨다.

“네가 여기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네가 고집 센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라. 저 사람은 누구냐? 왜 여기에?”

“오는 길에 만났는데 화순의 부대를 찾아간대요.”

인민군 소년병은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말을 꺼냈다.

“저, 여기....... 보통 사람들 옷이 있으면 하나만 주세요. 부대를 못 찾아가면 여기 사람들처럼 하고 어데 숨어야 할지 모르니까.”

소년병은 갑자기 기가 죽어서 애원조가 되었다. 그는 인민군 복장을 버리고 이곳 사람으로 변장해서 달아날 길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석두의 옷과 헌 신발까지 챙겨서 보자기를 싸주었다. 두 달 전에 씩씩하고 용감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던 인민군 병사가 이렇게 초라하고 애처롭게 느껴지다니. 돌변한 사태와 거리의 분위기에 소년병은 몹시 당황한 것이었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해. 고향에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고.”

어머니는 그를 골목까지 따라 나가며 가슴아파했다. 소년병은 골목길을 벗어나 떠나갔다.

“저 애보다는 네가 걱정이다. 어젯밤에 서홍이 찾아와서 너를 찾더라. 오늘 새벽에 모두들 출발한다는데 영암 월출산 방면으로 간다면서 어떻게든 오늘까지는 너하고 연락이 되었으면 하더라. 네 걱정은 말라고 했다. 당장 연락이 되지도 않고 너는 서울로 갈 거라고 했다. 걔들 따라가면 독안에 든 쥐야. 그러니 딴 생각 말아라.”

어머니는 석두가 서홍을 따라 갈까봐 불안하고 걱정이었다. 서홍이 주고 갔다면 쪽지를 석두에게 주었다.

석두 형. 자네를 못 만나서 가슴 아프네. 뭘 하든 자네와 행동을 같이 하고 싶었는데....... 지금쯤 신문학원에서 같이 강의를 듣고 있어야 하는데 시간(時間)이 곤두박질 친 것인지, 헛돈 것인지, 이제 와서 어떻게 하겠는가. 자네가 회의를 느끼는 것만큼 나도 답답할 때가 많았지만 선택한 길을 이제는 끝까지 가는 수밖에. 지금은 한반도에 밀려오는 파도가 썰물인지 밀물인지 모르고 썰물이 나갈 때 따라서 바다로 가지 못해 무래시장에 남은 해파리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무작정 따라가는지 모르지만 기왕 선택한 길 최선을 다하겠네. 자네도 자네의 길을 최선을 다해서 가길 바라네.

-서홍

편지의 내용을 보니 서홍은 석두가 행동을 같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견한 것처럼 느껴졌다.

“쪽지를 내가 읽어봤는데 서홍이는 속이 깊은 애 같더라. 좋은 친구지만 어쩔 수 없지.”

어머니가 말했다. 석두는 서홍을 만나지 못한 게 아쉽기 짝이 없었다.

썰물에 휘말려서 바다로 가지 못한 해파리가 모래사장에서 따가운 태양에 녹아 말라가는 이미지를 그려봤다. 그 이미지가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한 석두 자신의 이미지인지 아니면 선택한 길을, 선택한 길이라기 보다는 선택을 강요당한 길을 최선을 다해 가겠다는 서홍의 이미지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