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는 어머니의 말대로 유형의 시골 집에 다시 가 있기로 했다. 당분간 거기 있다가 전세(戰勢)와 정세(政勢)가 좀 안정되면 서울로 형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유현 집에서는 여전히 추어탕을 먹었다. 일종의 진공사태 같은 공백기간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3개월 전 공산군이 들어오기 전에 국방군과 경찰 관공서가 철수해서 행정 치안의 공백사태가 사오일 있었다면 인민군과 내무서, 인민위원회 등이 산과 북으로 달아난 뒤에도 사오일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이러한 공백기간은 겉으로는 평화로운 분위기이지만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감이 감돌았다.
유현과 석두는 집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으나 답답하기도 해서 하루는 마을어귀 까지 걸어 나갔다. 저 편에서 오륙명이 민간복을 입고 소총을 맨 사람들이 걸어왔다. 석두와 유형은 순간 당황했다. 저들이 빨치산인가? 아니면 경찰인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은 것이다.
“달아나지마. 달아나면 쫓아올 테니까! 빨치산은 밤이 아니면 안 내려오니까.”
유형이 말했다. 그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은 가만히 서있었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제방 길을 서둘러 가면서 말했다.
“당신들 뭐야?”
“피난 온 대학생입니다.”
“피난 온?”
“너희들 저 논두렁에 가서 엎드려!”
“내버려 둬. 그럴 필요 없어. 대학생이면 이제 가도 돼.”
그 중에 책임자 같은 사람이 시간낭비하지 말고 빨리 가자고 했다. 그들은 지름길을 찾아서 논두렁 길로 사라져갔다. 그들은 아마 경남 쪽으로 후퇴해 있다가 전남이 수복되니까 임지로 돌아오는 길 같았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아마도 미처 달아나지 못한 좌익분자의 매복 또는 석두나 유형이 보초와 같은 임무를 띠고 마을 어귀에 서성거리고 있지 않나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달아나면 잘못 판단해서 총을 쏠 수도 있다고....... 위험할 뻔했다.”
석두는 서홍 할머니가 야간에 내려온 빨치산이 “누구야!?” 하는 호령에서 “아저씨 편이여!”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상대가 국방군인지 빨치산인지 알 수 없으니 할머니는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쓴 것이다. 할머니를 확인한 산사람은 “우리도 할머니 편이여! 그러니 있는 곡식 좀 나눠 줘.”하며 곡식을 털어갔다.
유형은 입맛을 다시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유형은 좀 답답하더라도 당분간 꼼짝 말고 집에 있자고 했다. 그러나 며칠 뒤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도 안전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야밤에 빨치산이 내려와서 몇 집을 들러서 곡식을 털어가고 이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장이 전날 송정리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떤 일을 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두 번 빨치산이 내려오면 언제 또 내려올지 모르니 광주로 돌아가자고 유형은 말했다.
시_ 누구여!
나는 아저씨 편이여!
할머니는 외쳤다
할머니는 괜찮아, 어느 편이든
집에 누구 없어, 할매 말고?
다 떠나갔어
첫째는 국방군 따라가고
둘째는 산사람 따라가고
그리고는 없어
아무도 없어
나는 아저씨 편이랑께......!
석두가 광주로 돌아오니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 했는데 잘 왔다면서 마침 나주 출신의 서상덕(徐相德) 의원이 서울에 가는데 같이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이 집안에 문제가 있었다면 아버지가 경찰서에 연행되어 일주일 조사를 받고 나왔다는 것이다. 의사인 아버지는 자발적은 아니지만 인민군에 징발되어 인민군의, 부상병들을 치료해줬다. 말하자면 인민군의 군의관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산을 타고 북상을 할 텐데 연로한 의사동무는 힘드실 테니 집에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온 것이다.
석두 아버지는 보수 성향의 우익계 인사이니 나쁜 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의료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신고하고 인도적 입장에서 불가피했다고 변명하면 그만이었을 텐데, 단순하고 솔직한 아버지는 인민군의 어린 병사들이 예의 바르고 무척 선량했다는 둥 듣기에 따라서는 인민군을 찬양하는 말을 해서 당일로 귀가하지 못하고 일주일 동안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호되게 얻어맞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아버지의 일도 해결되었고, 너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고 너를 고발하는 사람도 없으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서울 형한테 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서 의원에게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하시더라.”
어머니는 석두에게 너는 계집애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아들만 삼형제를 둔 것을 아쉬워했다. 전쟁이 일어나니 아들을 걱정만 해도 골이 터지려고 하는데, 네 아버지까지 속을 썩인다고 푸념을 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