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가는 길_2 (19회)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일행을 태운 배는 파도에 시달리며 출항을 했다. 그러나 인천을 직접 향해 가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서 군산항에 기항하기로 했다. 군산항에 상륙해서 며칠 기다려서 인천항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면 언제 서울에 가나, 집을 나서서 열흘이 되어 가는데 이제 겨우 군산이다.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행은 여관에 머물지 않고 밤은 배에서 잤다.

석두는 들고 온 광목을 군산에서 처분할 수 없을까 해서 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그런대로 활기차 보였다. 아무리 세상이 시끄럽고 난세(亂世)라 할지라도 팔고 사고 돈을 벌겠다는 장사꾼들의 욕심과 기룰 죽이지는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마침 화폐개혁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석두는 화폐개혁이란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 어리둥절 했지만 광목을 사지 않겠느냐고 묻자 광목 한필에 신화폐로는 삼만 원, 구화폐로는 칠만 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고 묻자 당국이 세대당 화폐교환을 일정액 이하로 제한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 했다. 같은 돈인데 거래가치가 배 이상 나다니 참 어이없다고 생각되었다.

석두와 같은 여행자는 병사사령부의 여행자 증명이 있으면 오만 원까지 바꾸어준다고 했다. 호남지방은 인민군이 패주(敗走)하고 경황없이 후퇴했지만 패잔병과 지방출신의 빨치산들이산악지대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전선(戰線)없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지역전투사령부나 병사사령부의 여행자 증명이 없이는 청장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석두는 물론 전남 병사사령부의 여행자 증명을 소지하고 있었다.

배에 돌아와서 서 의원 비서, 경호원들에게 화폐교환에 대해 얘기를 했다.

얼마 되지 않은 돈이라도 은행에 가서 교환하기로 했다. 교환 환도액인 오만 원을 가진 사람은 없고 모두가 삼만 원 정도밖에 가진 게 없었다. 결국 석두는 광목 두필을 구화폐에 팔고 일행의 몇 사람에게 부탁해서 새 화폐로 바꾸기로 했다.

석두는 뜻밖에 서울까지 갈 것 없이 군산에서 일곱 배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만 원 투자해서 십사만원이 되었으니 돈벌이는 참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무거운 짐까지 덜었으니 더할 나위없다. 석두는 큰 트렁크를 들었다. 트렁크에는 무거운 광목 두필 대신 새로운 화폐로 십사만원이 들려 있는 것이다.

석두는 돈을 바꿔준 몇 사람을 다방에 초대했다. 항구의 다방은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반가이 맞이하는 레지도 도시의 레지 치고는 꽤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비싼 차를 주문했다. 위스키티, 쌍화탕 등등.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는 다방에 들어서니 마음의 안식처에 들어선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긴 항로에서 돌아온 마도로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레지는 큰 트렁크를 든 석두와 일행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인천 가는 배가 바다가 험해서 군산항에 정박 중인데 앞으로도 며칠 더 군산항 신세를 지고 묶여 있을 거라고 했다. 한번 뒤엎어진 가을바다는 여간해서 잠잠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몇몇 다른 손님이 왔다가고 레지가 와서 오늘 서울로 가는 트럭이 있는데 가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찻값은 오천 원이라고 했다. 석두는 마음이 동했다. 언제 배가 출항할지 모르고 출항을 해도 파도가 세면 또 뱃멀미를 할 텐데......

뱃멀미의 고통스러움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석두가 칠산바다와 군산항에 오는 길에 겪은 뱃멀미는 생전 처음 겪은 것이지만 다시 그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자 끔찍했다. 석두는 서 의원에게 상의를 했다. 서 의원은 어머님 부탁이 서울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라는 것인데 좀 불안하지만 좋도록 하라고 허락해주었다.

▲ 한국전쟁의 한 풍경 /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소녀 너머로 탱크가 인상적이다 [출처 ;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석두는 가벼워진 큰 트렁크를 들고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은 오후 다섯 시쯤 출발했다. 오후 다섯 시에 군산을 출발해서 논산의 지방도로로 나가 1번 국토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다. 그러면 통행금지 시간 전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삼선교에 있는 형님 집에 그 시간에 갈수 있는지 생각을 해보고 트럭을 탔었어야했는데 오로지 서울에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트럭이 논산에 도착했을 쯤에는 저녁노을이 지고 어두워졌다.

논산에서 연산으로 이어지는 1번국도변의 나지막한 산맥에 봉화불이 이어져 있었다. 연산이라는 이름은 산이 이어지고 연결되는 지세라서 연산이라고 이름 지어졌을지 모른다. 논산에서 연산으로 이어지는 산의 중턱에 불꽃으로 선을 만들고 있는 봉화는 인민군 패잔병이나 빨치산이 이동하는 봉화불이라고 했다.

왜 패잔병들은 달아나면서 봉화불을 올리는 것일까? 저희들끼리 연락하는 것이 있는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를 과시하려는 속셈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트럭은 아침에 서울을 출발하여 급한 손님을 태우고 군산에 돌아오고 저녁때 군산을 출발해서 서울로 가는데 저 봉화불 행렬은 매일 밤 변함이 없다고 트럭의 차장격인 청년이 말해주었다. 저 봉화불 행렬이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라면 열댓 명의 승객과 짐을 싣고 1번 국도를 타는 트럭에는 그지없는 위협이지만 패잔병들이 내려와 차량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패잔병과 빨치산이 산을 타고 저렇게 북상하는데 미국과 국군은 왜 공격하지 않느냐고 묻자 유엔군이 벌써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북상하고 있는데, 저것들 상대할 겨를이 있겠느냐고 했다.

피아의 전선은 38선을 넘어 북상하고 있는데 그 전선에 복귀하지 못하고 전선 후방에 뒤쳐진 인민군이 발버둥 치며 북상하고 있는데, 유엔군은 북상하는 인민군의 소부대를 아무데서나 공격하지 않고 북상하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서 요격한다고 했다. 전선은 북상하여 평양과 원산에 육박하고 있지만 후방에 뒤쳐진 인민군으로 인하여 남한의 모든 산악지대가 전선(戰線)없는 전선이 된 것이다.

짐을 실은 트럭의 뒤 칸엔 모두들 짐짝처럼 실어 서울로 달려갔다. 도로가 전쟁으로 파손되어 트럭이 심하게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앉아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침묵 속에 트럭은 열심히 서울로 달려갔다.

밤 열한시가 다 돼서야 서울역 건너편 회현동으로 올라가는 모퉁이에서 트럭이 멈추어 섰다. 그 모퉁이에는 7층 건물이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무너지고 소각되어 시커먼 벽만이 우중충하게 솟아 있었다. 짐짝처럼 실려와서 짐짝처럼 내려진 것이다. 석두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까지 오기는 했지만 꽤 큼직한 그러나 별로 무겁지 않은 트렁크를 들고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