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에서의 박금옥 선생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구맥회 동인들은 광주에 올라오는 박금옥 선생을 자주 만났다. 박금옥 선생은 구맥회 동인들을 만날 때는 혼자 오지 않고 순천여고의 여자 교사 손 선생과 같이 오셨다. 박금옥 선생은 몸매는 크지 않지만 전남이 고향인 야무져 보이는 여 선생님이라면 손 선생은 서울에서 내려온 큰 키의 외향적 여 선생님이었다.
박금옥 선생이나 손 선생이나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이 많은 그러니까 문학소녀 시절이 있었던 20대 후반의 미혼의 여 선생님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구맥회의 청년이나 처녀라고 하기에는 아직 좀 어린, 그러나 소년과 소녀라고 하기에는 좀 성숙한 동인들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너희들의 꿈은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머지않아 사회에 나가면 그때는 깨지고 말 거야. 너희들의 꿈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손 선생은 왜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와 순천여고 교편을 잡으신 걸까? 성격이 무척 쾌활하고 외향적이며, 승마를 즐긴다는 손 선생도 그 쾌활하고 명랑한 외향과는 달리 슬픈 사연이 있어 낙향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석두는 했다.
하여튼 박금옥 선생과 손 선생은 고분고분 순종하는 한국의 여인상은 아니었다. 성격이 강해 보통의 남성들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니까 두 여인은 한반도 남단의 여수와 순천, 바로 여순사건이 있었던 시골여고의 교편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순사건 때는 아무 일 없었을까...... 석두는 불쑥 질문을 했다 .
“어두운 영화관에서 옆에 앉은 낮선 남자가 선생님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러자 박금옥 선생이 즉각 답변했다.
“이 손 누구 손이요? 라고 외치고 손을 번쩍 들지.”
석두는 통쾌한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0년대 당시의 대부분의 한국여성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손 선생은 답변은 하지 않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손 선생은 “너희들의 아름다운 꿈도 졸업하면 결국 다 끝날거야.”라고 얘기했다. 손 선생의 얘기를 들은 뒤 구맥회의 어린 동인들도 나름대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모임이 깨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짝을 맞춰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하여튼 우리들의 모임은 깨지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고 한국문단을 주름잡고 있는 구인회 못지않게 구맥회가 큰 열매를 맺고 큰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고 기염을 토했다. 사실 구맥회의 젊은 동인들은 문학을 한다고 허풍만 떤 것은 아니었다. 학생문예지나 교내 신문에 시나 수필을 발표할 뿐 아니라 동인지 발간 계획도 세웠다. 동인지는 인쇄할 능력이 없어서 아홉 명이 돌려가며 자기 작품을 필사하는 필사본 동인지를 추진했다.
구맥회의 꿈, 그리고 임박한 졸업과 앞으로의 진로 등을 생각하면서 불안하고 바쁜 매일을 모두가 보내고 있었다. 특히 꿈과 애정이 깃든 구맥회의 모임이 대학진학과 사회 진출 후 산산조각나지 않을까, 뿔뿔이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 불안이 1949년이었다면, 1950년에는 그들 자신의 환경변화나 사정에 의해서 보다는 한반도에 몰아친 엄청난 폭풍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날줄은 몰랐다.
석두는 1950년 봄 광주서중 6년제를 졸업하고 동시에 중앙대학교 국문과 2학년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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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천여고 손 선생님(앞줄 왼쪽)과 구맥회 / 1949년 광주 무등산 기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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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총선거가 있었다. 그때 그 무렵, 그러니까 1950년 4월 아홉 명의 구맥회 동인 가운데 세 명(석두와 서홍, 瑞紅), 그리고 신태호)만이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신태호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 신입생으로 바빴고, 그러니 자연히 석두와 서홍 두 사람만이 자주 만났다.
두 시골 문학청년도 북조선 인민군의 남한 침공, 그것도 단시일 내에 3.8선을 넘어오리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로서는 꽤 귀한 사치품인 제니스 라디오의 FM전파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이북방송이 심상치 않았다. 민전(民戰)의 노래와 조국통일 행진곡이 매일같이 흘러나왔고, 내일이라도 쳐내려올 분위기였다.
석두는 그동안 서울에 올라오면 상과대학을 다니면서 네임플레이트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사촌형님의 입정동 집에 기숙했으나, 1949년 가을 의과대학을 다닌 친형님이 어머니의 숙명여고 클래스메이트의 딸과 결혼하고 삼선교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신혼살림을 차렸으므로 석두는 거기에 옮겨 기숙하게 되었다.
그래서 석두는 서홍과 같이 성북구의 선거연설회에 가봤다. 성북구에는 이승만계의 조병옥(趙炳玉)과 김구계의 조소앙이 치열한 경합을 하고 있었다. 조소앙(趙素昻)의 선거연설에 석두를 놀라게 하는 내용이 있었다.
조소앙은 김구(金九) 선생을 모시고 평양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북한이 엄청난 군비를 소련으로부터 받고 있으며, 북한 전체가 병영화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 거기에 우리가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석두와 서홍의 판단을 뒷받침해주는 정보를 조소앙은 선거연설에서 웅변적으로 말해 준 것이다.
1950년 5월 총선거는 이승만(李承晩)지지 세력과 반이승만 세력의 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승만 세력의 참패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헌법에는 대통령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였으므로 정권교체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북진통일을 정책으로 내세우는 이승만의 몰락은 한반도에 평화적 통일 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그러나 북한으로서는 희망적 정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남북사회단체의 평화회의를 제의하고 있는 북한정권이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석두는 북한정권이 위장 전술을 쓰고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들은 침공을 준비하면서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민주주의와 민족을 내세우는데 남쪽의 대한민국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내세우니 뭔가 거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정권의 주장은 철저히 위장전술이라면 남한정권은 너무나 속마음을 드러낸, 그러니까 정직하고 순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얼마 되지 않는 당시의 지성인들은 전쟁을 일으키려는 세력을 악으로 생각했다.
실질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곳은 북쪽이고 전쟁에 대비해서 아무런 준비가 없는 곳은 남쪽인데,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를 위시한 세계의 지성들은 남쪽정부가 전쟁을 준비하고 도발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