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늦게 일어났다. 그것도 무언가 음악소리 같은 맑은 음성에 잠이 깼다. 여중 4년에 조기졸업하고 부모의 권유로 시집간 정호가 찾아왔다. 구맥회(九麥會) 멤버였다.
정호는 불쑥 일본에 가려한다고 했다. 그것도 혼자서 밀항을 한다는 것이었다.
“뭐 신혼의 재미는 어떻게 하고, 혼자서...... 말도 안 돼.”
남편도 허락했다는 것이다, 남편의 집안에 친척 되는 사람들이 일본 고베에 많이 살고 있고, 애당초 결혼을 할 때 공부를 더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는 것이다.
“남편은?”
남편도 다음에 일본에 건너와서 같이 살 거라는 것이다.
“정호(靜湖)가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그렇게 달아날 이유라도 있어?”
정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석두를 바라본다.
“달아나다니? 내가 왜 달아 나냐?”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고 불투명하니까...... 뭔가 터질 것 같아서 불안하니까..... 게다가 정호 시댁은 엄청난 부자니까......”
“불안해서 달아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겠다는 생각으로 일본행을 결심한 거야. 결혼하면 하고 싶은 일 포기하고, 공부도 포기하고, 가정에 들어가는데 나는 그 반대여. 그이도 내게 약속했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적극 도와주겠다고......”
“정호 신랑은 마음이 넓구나. 나는 또......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은 해외로 도피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이유야 어떻든 모두 떠나간다는 생각이 들어서 석두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작년 늦가을에 월북한 세 친구와 헤어질 때도 쓸쓸했다. 그들의 선택이 결코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의 앞길이 몹시 걱정스럽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념을 가지고 선택한 길을 가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회색분자는 언제나 뒤에 처지고 떨어진다는, 그래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는 여자 형제가 없었다. 그래서 문학서클에서 만난 정호가 때로는 누이처럼, 때로는 누나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갑자기 시집을 간다고 할 때도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꿈과 이상을 가지고 모두들 떠나간다니 할 말이 없지만 어쩐지 모두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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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8월 이후 미국과 소련의 군사분계선으로 그어진 38선. 분단 초기만 해도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월북, 월남이 용이했다. (사진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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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는 말없이 석두를 쳐다봤다.
“정호는 일본 가려고 시집간 거로군.”
“그건 아니지만 석두 씨 의견은 어때?”
“이미 다 결심하고 결정한 것 같은데, 뭐......”
이럴 때 어떤 의견을 말해준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좋다, 나쁘다, 가라, 가지마라, 하는데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었다면 좋으련만......“
정호가 밀항을 해서 일본을 간다는 것이 어쩐지 서운하고 가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다. 성공을 빌 수밖에......
작년에는 같은 학년의 친구 셋(1조의 야구반이었던 김용구, 정영기, 이달재)이 찾아와서 좁은 하숙방에서 며칠을 묵고 갔다. 그들은 월북을 한다고 했다. 석두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다.
원래 네 사람이 가게 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이 못 가게 되었으니 네가 가도 티오가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두는 가지 않았다. 좌익학생 조직에 가담은 했지만 어떤 신념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사상적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더욱이 지금은 조직에서 이탈한 처지니, 월북은 생각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월북해서 구체적으로 무얼 하나?”
“월북해서 사상교육과 유격훈련을 받고 남조선 해방전선에 참가하는 거지.”
그들은 의기양양했다.
석두는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기만 했지만 월북해서 몇 개월 훈련을 받고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 유격대로 남파되면 오래가지 못해 사살되거나 생포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니 소모품이 되기 위해 월북하는 것이다, 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착실하게 힘을 키우고 있는 인민군과 남로당의 조직이 일제히 봉기하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두는 그들의 생각을 뒤집을 만큼 확실한 신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속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북쪽의 방송에서는 자주 민전(民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민전이란 민주주의 민족전선(民主主義 民族戰線)의 약자이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어휘는 2차 대전의 종전으로 해방된 그들에게, 사춘기의 그들에게 가장 새롭고 매혹적인 어휘였다. 민족이라는 어휘는 젊은이들에게 과거의 치욕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찬란한 어휘였다.
민주주의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다.
북반부에 자리를 잡은 김일성 정권은 세계의 공산화를 꿈꾸는 소련의 뒷받침으로 수립된 정권이다. 공산주의는 민족을 넘어서 세계화를 지향하는 사상이고, 노동계급의 독재를 꿈꾼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집단이다.
그런데 그들은 민주주의와 민족을 내세우며 지식인들과 학생들을 현혹하고 있다. 그러한 의구심을 말하면 공산주의는 궁극적인 이상이지만 현 단계에서는 민족을 위해 싸우고 민주주의 달성과 실천을 위해 전진한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