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군사력에서 형편없이 뒤쳐져 있었다. 석두와 서홍의 생각에는 아주 심각한 위기국면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지켜주어야 할 미국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다. 언제든지 포기하겠다는 식의 발표를 국무장관 마샬이나 에치슨의 입을 통해서 신문에 흘려보내니 뭔가 터지고 말겠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대한민국과 이승만 정권을 포기하고 북조선의 인민군이 남반부를 점령하면 적화통일이 될 거라는 시나리오가 곧 현실화될 것 같이 느껴졌다.
두 시골 청년,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려보이고 소년이라고 하기에는 걸맞지 않은 그런 시골 머슴아들이 삼선교 석두의 방에 앉아서 진지하게 세계정세를 논하고 자신들의 장래를 격정하고 있었다. 김석두(金夕杜), 그는 스물이었는데, 만으로는 십구 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앙대학교 국문과 2학년이었고, 정서홍(鄭瑞紅)은 스물하나, 만 이십 세였지만 이제 고려대 1학년 신입생이었다.
서홍은 고려대 철학과에 진학했는데, 석두는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중앙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말하자면 설익은 문학청년들이었다. 두 사람 말고도 서너 명이 더 어울려서 문학동인을 만들어 어울려 다녔으며,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도스도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 같은 것을 일본어 번역판으로 읽는가하면 보들레르나 랭보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건방을 떨었다.
석두가 중앙대 국문과에 들어간 것은 우리 문학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서홍이 고려대 철학과에 들어간 것은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니까 그들은 철두철미한 문학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시국을 논하고 불확실한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 놈들이 우리를 버릴 것 같아.”
서홍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국 놈들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면 잘된 거지. 미국 놈이건 소련 놈이건 다 떠나가야 해. 우리의 일은, 우리 민족의 일은 우리가 해결해야 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끼리 해결한다고? 말이야 쉽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공산주의가 이 땅에 들어서는 거야. 북조선의 인민군과 우리의 국방군은 그 전력이 비교가 안 된다고....... 그리고 소련은 완전히 철군했다고 하는데, 공산주의는 민족을 넘어서서 국제 공산당이 있어. 중국을 봐라. 장개석(蔣介石)이가 아닌 모택동(毛澤東)이 대만으로 쫓겨났다고 해봐. 소련과 국제공산당이 가만히 있겠는가? 이미 승부가 끝난 거야. 중국대륙이 공산화 되어도 아무 소리도 않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가 적화통일이 된다고 해서 눈 하나 깜빡하겠느냐고?”
서홍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도 이승만 박사는 뭔가 믿는 게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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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군이 남한을, 소련군이 북한을 나눈 군사분계선인 38선 [1946년 Alfred Eisenstaedt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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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야 반공통일, 북진통일을 외치지만 믿는 나무에 곰팡이 낀다고 미국의 강경파들이 오리발 내민다고. 덜레스 봐라. 38선을 시찰하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나 되니? 덜레스 말 믿었다가 앉아서 당하는 거여. 너 같은 프티 브르주아는 제일 먼저 숙청감이야. 보들레르나 랭보같은 퇴폐적인 시나 읽고 앉아서 별수 있어?”
“야, 그래도 나는 너보다 나아. 우리 집은 의사니까 그래도 기술 노동자야. 너는 지주의 아들이니 꼼짝없이 당하는 거지.”
“기술노동자도 그 원래의 성분이 문제야. 너 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다 지주가 아니냐? 그보다도 네 자신이 문제야. 퇴폐적인 인텔리겐차로 낙인이 찍힐 테니까.”
석두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민족을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면 수용을 해야지.”
석두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서홍이 주머니에서 신문 한 장을 꺼내어 석두에게 보라고 내밀었다.
“이게 뭔데?”
“거기 신문학원 광고가 있지? 그 신문학원 시험을 치자!”
“신문학원은 왜?”
“신문기자가 되는 거야. 공산화되었을 때 우리 같은 계급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종이 신문기자일지도 몰라. 신문기자 또는 선동공작반, 무엇을 하더라도 신문기자 신분을 따놓으면 유리할 거야.”
“신문기자 응시자격은 대학 2학년은 수료해야 해. 우리는 시험 칠 자격도 없다.”
“내가 알아볼게. 수료증이야 못 만들겠니?”
서홍은 H대학 2학년 수료증을 구해올 테니 내일 당장 원서를 넣고 보자고 했다. 내일 점심때 오겠다며 통행금지 시간이 임박해서 돈암동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석두는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도 금방 잠이 들지 않았다. 불안하다고나 할까.? 웬지 긴장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서홍이 감명 깊게 읽었다며 불멸의 명저라 할수 있으니 꼭 읽어보라고 두고 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흐리멍텅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일본어 번역이 나빠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철학 서적이란 어렵지만 파고들면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어서 지루하지만 애매하고 흐리멍텅 하지는 않다.
그런데 ‘차라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학서적 답지 않게 체계가 없고, 단편적(斷片的)이라 생각되었다. 철학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넋두리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단 말인가!’라는 구절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공감을 느낀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는 처절한 외침으로 느껴졌다.
우리 민족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해방(解放)되었다. 누구의 힘으로 무엇으로 해방되었는지도 모른 채 갑자기 해방되었다. 그래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허허벌판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神)은 죽었다는 소식도 모른 채 안이하고 막연한 기대와 저마다의 꿈을 안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는 운명의 땅이다. 시베리아의 광활한 대지를 서쪽에서 불어온 회오리바람과 파도치는 태평양을 건너온 바람, 이름 없는 바람, 해풍(海風)이 한반도에 맞부딪쳐서 거대한 구름의 층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 구름은 아침저녁의 햇살에 노을이 질 때면 황홀한 순간을 연출한다.
니체의 예언적인 문장 - 한편의 연극이라면 주인공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코러스에 불과했다. - 이 무언가, 우리 민족의, 우리의 고통을 예언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