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는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속임수다, 위장전술이다 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석두는 경찰에 검거된 적이 없고 결과적으로 조직 경력이 가장 오래된 자가 되었다. 그런 석두에게 좌익학생 조직으로는 강성으로 알려진 서중학교의 교책을 믿으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석두는 어이없다고나 할까,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조직에 참여해서 행동은 하지 않고 관망만 하는 자에게 조직의 책임을 맡으라니 말도 안 된다, 조직의 종말이 온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조직을 이탈할 것을 결심했다.
태호가 시골집으로 달아났다면 나는 서울로 달아날 수 있다. 학교는 관두고 대학에 갈수 있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면 된다는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서중학교의 조직에 관여하면서도 조직을 이탈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석두가 학년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같은 반의 급장이었던 친구 태호에게 점조직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랬더니 태호는 이튿날부터 결석을 하고 시골로 가버렸다. 현명한 태호는 학교에 나오면 권유를 거절할 수 없고, 그렇다고 조직에 참가하면 경찰과 학련이 두렵고, 그래서 학교를 안 나오고 시골집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몸조심하는 데는 학교에 안 나오는 것이 최상이다. 학교에 안 나오면 반탁을 외치는 학련이나 찬탁을 내세우는 좌익 조직에 가담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석두에게 서중학교의 교책을 맡으라는 지령이 내려온 것이다. 열성적으로 투쟁을 한다고나 할까, 상부의 지령을 실천에 옮긴 자들은 결국 노출되어 경찰에 잡혀가서 고문당하고 퇴학을 당했지만, 점조직에 몸을 숨겨온 석두는 결국 광주서중학교 5학년 때 독서서클의 조직에서 이탈하고 부모에게는 검정고시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서울에 올라왔다.
석두가 조직을 이탈할 결심을 한 것은 광주지역의 모든 학교 조직의 책임을 맡고 있다는 자가 번번이 거짓정보를 말하며 점조직에서 벗어난 집단적 행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두 생각에 점조직에서 벗어나 집단으로 전환을 하면 며칠 못가서 모두 검거될 것이고, 이곳저곳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 했는데, 모두가 헛소리였다.
북에서 지령이 온다고 했는데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은 다 북으로 피신해서 안전하게 있으면서 남쪽의, 동무들에게 봉기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더욱이 조직에서 추방되거나 숙청되어야 하는 석두와 같은 회색분자에게는 서중학교의 조직을 책임지는 교책을 맡으라는 말에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희생양이 되겠다는 판단에서 말없이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그 후 들리는 소문에 가장 착실하고 온건한 친구들이 독서회와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혼쭐이 나고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지방유지나 부자의 자제들이어서 부모들이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서 서울의 중학교로 전학을 하거나 일본으로 빠져나가 그곳 중학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석두가 학교를 결석하고 서울로 피신해온 후 엉뚱한 사람들이 날벼락을 맞은 격이다.
북반부에 가서 기생한 남로당 간부들은 김일성과 북로당에게 뭔가 남쪽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봉기해야 한다고 선동을 했고, 깊은 생각 없이 친구의 권유에 따라 조직에 참여했다가 혼쭐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시국(時局)이 그걸 강요하고 있다고나 할까. 시대의 물결이 모든 것을 휩쓸어가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랄까? 시대의 조류가 우리 민족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
|
| ▲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장면. 사진 왼쪽은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중장이고, 오른쪽은 미·소 공동 위원회 소련 측 대표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1907~1964) 중장이다. [출처: 우리역사넷] |
|
서구열강의 침략수법을 배우고 모방한 일본제국주의는 제일 먼저 조선을 침략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에 패배함으로써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한 것이다. 전쟁의 승자인 미국과 소련이 일본의 제국주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를 만들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에 안정적이고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내놓은 안이 신탁통치 안이다. 일정기간 미소가 신탁통치를 함으로써 혼란을 피하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통일된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을 내쫓고, 한반도를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점령을 한 그들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지배할 절대 강자이다.
그들이 50년 전에 한반도에 와서 38선을 경계로 남북을 나눠서 점령했다면 분명 일본을 대신해서 한반도를 식민지를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50년의 세월이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제국주의와 싸워서 승리한 그들이 승자라고 해서 제국주의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남북으로 나눠서 식민지로 삼으면 간단한데 그럴 수 없으니까 그들은 이리저리 궁리를 했다.
그들은 식민지로 삼을 수 있지만 전후의 세계에 힘의 균형을 위해서 편싸움을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어느 쪽 편에 서게 될 것인가? 그것은 어떤 체제의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달려있다. 미국과 소련은 여러모로 궁리를 하고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그런 끝에 내놓은 안이 신탁통치 안인 것이다.
한반도에 중립국 감시단의 감시 하에 민주적 방식에 의해서 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면 되는 것이다. 약간의 혼란이 있을지 모르지만 밀어붙이면 안 될 것이 없다. 그러나 미소양국은 어떤 체제의 정권이 들어설 것인가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CIA나 KGB의 정보로도 남북을 아울러서 총선거를 할 때 어느 쪽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어느 한쪽이 승리를 했을 때 극심한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반대세력의 심한 저항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통일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절차를 뒤로 미루는 신탁통치 안이 나왔을 때 좌익과 우익의 대부분의 인사들은 반대였다. 일부 종간파의 온건한 인사들을 빼고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익세력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급선회했다. 그래서 전국의 학원가에 반탁(신탁통치 반대) 학생연맹이 조직되었고, 좌익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구호를 내세우고 각종 조직을 만들었다.
미소당국은 신탁통치 연후에 총선에 의해서 새로운 정부를 만든다는 그럴싸한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결과적으로 국론의, 분열을 가지고 왔다. 국가가 탄생하기 전이니까 국론의 분열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국론의 분열이라기보다 민족의 분열을 가지고 왔다고 할 수 있다.
국가라고 하는 틀은 따지고 보면 허구요, 민족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민족이 산산조각이 나고 분열을 했으니 일제에 의해 수탈된 나라의 틀을 되찾는다는 것은 헛된 꿈이 되었다. 물 건너 간 것이다.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겪었다고 하나 다 헛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