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간 청춘이여 (27회)

둘이는 서둘러 이리역으로 나갔다. 이리는 전라선과 호남선이 나누어지는 철도의 요충으로 호남선의 송정리나 전라선의 순천으로 가는 기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역으로 갔다.

마침 송정리까지 간다는 화차가 증기를 뿜어내며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긴급히 수송할 물자가 있어서 화차와 화차가 연결된 두개 차량에 짐을 싣고 가는데 그 짐 위에 경호병 몇 사람만 타고 가는데 잘 부탁하면 태워줄 것이라고 했다.

미스현이 나서서 책임자와 교섭을 했다. 석두는 저만치 떨어져서 보고 있는데, 책임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 보여 성공한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미스현의 얘기로는 표를 파는 것은 아니지만 표값에 해당하는 사례를 하면 태워준다고 했다. 공비가 출몰하니 도중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 위험을 피해 가려면 애당초 길을 나서지 말아야지 무조건 가는 수밖에 없다고 석두는 생각했다.

열차는 기관차가 뒤에서 무개 화물차 한량을 앞에 달고 거꾸로 달리는 것처럼 달렸다. 기관차가 후진하는 것처럼 달리고 기관차 뒤쪽에 다섯 명 정도의 경호병이 총을 겨누고 자리 잡았다. 기관차 뒷부분에 연결된 평상시에는 석탄을 실을 것 같은 화차에 짐이 실어지고 그 위에 스무 명 가량의 민간이 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차가 불발하려고 하자 이곳저곳에서 나타나 짐을 실은 차량에 올라탔다.

만약 공비의 습격을 받는다면 화차의 짐짝 위에 탄 민간인들이 표적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기관차의 화차 한량, 그러니까 기관차가 달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관차는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노령산맥을 관통하는 갈재터널을 지날 때는 모두 긴장했다. 전라남북도를 갈라놓은 노령산맥은 빨치산이 많이 출몰했고 통과하는 열차를 습격하는데도 지형적으로도 유리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열차 습격이 자주 발생하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갈재터널과 백양사로 가는 사거리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장성과 임곡을 통과하고 이제는 무사히 종점인 송정리까지 다 왔구나 하고 모두들 긴장을 푸는 순간, 기관차가 무엇인가에 부딛혀 “뻥!”하는 충돌음과 함께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이제는 죽었구나 했다. 기관차가 급정거를 했다. 기관차가 그렇게 시원스럽게 급정차를 할 수 있다는 게 석두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달리면 탈선할 것 같아서 공포에 질려있던 사람들은 일단 기관차가 멎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빨치산의 공격을 겁내서 모두 엎드려 최대한 몸을 낮추었다. 한참 후에 경호병들이 뛰어내렸다.

빨치산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관차가 충돌한 것은 레일점검반이나 수리반이 치우지 않고 방치한 트레일러였다. 모도들 살았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탈선할지도 모르고 그대로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의 전쟁이 이 기관차처럼 시원스럽게 급정거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석두는 밤길을 걸어 광주 루문동 집으로 돌아왔다. 미스현과는 언제 헤어진지도 모르게 헤어졌다. 미스현은 담양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잘 가라는 말도 없이 헤어진 것이다.

석두는 1.4후퇴 피난민들에 섞여 수원으로부터 남하한 뒤 나흘 만에 광주 루문동의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만이 집을 지키고 계셨다.

부친은 석두가 서울로 가기 전에 인민군에 끌려가서 군의로 따라다니다가 인민군 대장이 이제부터 북으로 후퇴하니 연로한 군의관은 집으로 돌아가라 해서 돌아왔는데, 인민군에 협력했으니 부역했다고 해서 경찰에 끌려가 호되게 얻어맞고 돌아와 그 후유증으로 누워계셨다.

어머니는 석두에게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 했다. 그러나 석두는 친구들 소식이 궁금했다. 자전거를 타고 서방면에 사는 태규를 찾아갔다. 태규도 집에 처박혀 있었으나 아무 소식도 모른다고 했다.

▲ 1951년 라이프 지가 마가렛 버트 화이트 기자를 호남 지방으로 보내 종군 취재해서 촬영한 사진이다.(1952. 11.) / 사진은 호남지역의 도로를 감시하는 경찰의 초소이다. 단단히 요새화 되어있다. 주변 산은 그때 한반도의 다른 산들과 같이 완전 민둥산이다.

두 사람은 광주 남산 기슭에 사는 걸탄을 찾아가기로 했다. 결탄 집을 찾아가니 걸탄의 여동생과 앞집에 사는 시년이 울고 있었다. 걸탄이 바로 전날 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걸탄은 광주서중 교사의 방화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그 후 폐병을 앓아 광주도립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 퇴원해서 약도 변변히 쓰지 못하고 각혈을 하며 앓다가 바로 전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석두가 호가 걸탄인 내진을 만난 것은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광주서중 교정에서 만나 허방원을 풀어주며 달아나게 해준 적이 있는데,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입원치료를 해야 하는 폐병환자가 전쟁의 와중에 투병생활을 하다가 떠난 것이다.

걸탄의 여동생, 그리고 시년은 그냥 울고 있었다. 걸탄의 노모는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장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무덤이라도 찾아야 하는데, 속수무책으로 세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떠나간 벗의 무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태규와 석두는 광주에서 30리 떨어진 남평(南平)에 살고 있는 소민(素民)을 찾아갔다. 세 사람의 상의 끝에 “우리가 묻어주자.”고 합의했다. 시대를 잘못 만나 억울하게 생애를 마감한 친구에게 무덤이라도 마련해주자는 생각이었다. 구맥회(九麥會)의 여자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광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무등산(無等山) 기슭, 광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무덤자리를 잡았다. 틀림없이 명당자리였다. 다만 누구의 소유인지도 모르고 묘를 써야 되는지도 모르는 언덕 위에 무조건 무덤을 판 것이다.

무덤을 쓰고 나니 붉은 겨울의 태양이 먼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걸탄의 여동생까지 해서 여섯 명의 젊은 남녀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광주서중의 교가를 부르고 생각 나는대로 합창을 했다. 그들이 정성으로 가꾼 그러나 불법임에 틀림없는 묘를 만들고 친구를 떠나보낸 것이다.

아홉 명이 모여서 문학을 논하고 동인지를 내자고 모인 구맥회에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스쳐간 뒤 세 사람은 떠나가고 여섯 명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