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형,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노천명 시인이었던가요? 언젠가 말씀을 드린 바 있는 오도암에 왔습니다. 함께 와 보고 싶었지만 자칫 금년마저 넘길세라 혼자서나마 달려왔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오도암 옛 자리에 와 있습니다. 그간 암자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어지고 손바닥만한 잡초더미 묵밭뙈기에 오도암 터(址)라는 푯말만 비목처럼 섰습니다. 무상한 것이 인간사뿐 아님을 절감케 합니다.
하긴 그럴 만한 시간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반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었으니까요. 당시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던 내가 친구들과 이곳을 다녀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팔공산 자락의 한밤(대율:大栗)마을에 제2석굴암이 발견되어 화제였고, 사춘기를 앓고 있는 우리 또래들이 비로봉 등반을 겸한 구경에 나섰던 것이지요. 5 ‧ 16혁명 기념공휴일을 낀 연휴였습니다.
그간 문득 문득 이곳을 한 번 다녀가고 싶었습니다. 한밤마을의 보리밭, 상투를 튼 노인이 옹기를 굽던 가마 풍경도 그리웠지만 오도암을 꼭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그곳 암자에 살고 있던 소년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등산로를 안내하겠다면서 비로봉까지 우리들을 따라나섰던, 당시 열 살이나 됐을까 말까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때 소년은 참 외로웠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우리들이 반가웠던 것이겠지요.
소년이 지팡이를 만들어 주던 일을 기억합니다. 비로봉 막바지 급경사에서 기진맥진한 내가 안쓰러웠던지, 소년은 길가의 나뭇가지 하나를 낫으로 찍어서 지팡이로 깎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아그배나무라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그배나무를 식별하지 못 합니다. 단지 그때 소년이 알려주었던 이름만 기억할 따름입니다. 그때 소년의 능숙한 낫질 솜씨도 기억합니다.
그가 여전히 소년일 리 없고 지금껏 그곳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금년 오월에는 꼭 이곳 오도암을 다녀가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나이 탓인가 합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세상살이에 힘이 빠지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사실 그때 나에게는 절실한 사연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당시의 분별없는 젊음의 실수요, 그로 인한 일생의 회한이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들의 나들이는 수위의 ‘무전여행’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고생을 사서 경험한다는 명분으로 용인되던(?) 당시의 사례였습니다. 쌀과 고추장만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면서 식사는 노역이나 구걸로 해결하고 교통기관은 얻어 타고 다니며 잠은 절이나 대합실에서 때운다는 이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론 같지 못해서 시종 무리와 억지투성이였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읍내에서 한밤 마을까지의 버스 여행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순번이었습니다. 처음 나선 길이라 막막하고 당황스러웠지만 용기를 내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찻삯을 요구하는 여자 차장에게 무전여행을 들먹이며 간곡히 사정해 봤지만 일언지하의 퇴짜였습니다. 순간, 주위의 모든 승객들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부끄러움에 휩싸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고함을 빽 질러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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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1 때 무전여행 가는 길의 오도암에서 / 왼쪽이 필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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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비슷한 차장의 그럴 수 없는 매정이 너무나 야속하다는, 나대로의 울분을 담은 폭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놀라서 물러나고 대신 뒷문의 남자 차장이 달려들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태였습니다.
곧 바로 경험 많은 내 친구들이 각본대로 달려와서 능숙하게 뜯어말리면서 사과를 하고, 운전수 또한 남자 차장을 달래면서 버스를 출발시켰으므로 우리들의 무임승차는 그런대로 해결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미숙했던 처신에의 자책과, 마치 깡패라도 되어버린 듯한 수치심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좌석에 움츠려 처박힌 채 버스가 빨리 도착하기만을 고대할 따름이었습니다.
읍내를 벗어난 버스가 보리밭 들판길을 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묵묵하던 운전수가 우리들이 들으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부모를 잘 만나서 오늘 같은 날에 구경이나 다니는 학생이지만 우리 차장들은 그렇지 못한 탓에 일을 하는 직장인들이오. 서로 돕고 격려하며 살아야 할 젊은이들끼리 윽박지르고 폭언을 한 여러분들의 행위는 명백한 행패요. 차는 태워 줄 테니 부디 반성하고 뉘우치시오. 나도 학생들만한 자식이 있는 사람이오.”
운전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예리한 살촉처럼 가슴에 와 박혔습니다. 그러고는 객지로 유학 보낸 자식을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눌러 왔습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문살을 잡고 승강 계단에 선 채, 바깥을 내다보며 울고 있는 여자 차장의 모습을 봤을 때는 달리는 차창으로 뛰어내리고만 싶었습니다.
그날, 비로봉 턱밑의 오도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나의 바보 같았던 발악이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버스 종점에서나마 사과하지 못한 실수가 후회스러웠습니다. 애초 무전여행 꾼들의 무용담에 혹해서 요량도 없이 따라나선 일도 뉘우쳐졌습니다. 암자의 새벽예불 목탁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그날 이후 해마다 이맘때면 문살을 잡고 흐느끼던 소녀의 눈물 젖은 뽀얀 얼굴이 떠오르면서 미안하고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고 생업에 휘둘리면서 나도 몰래 잊은 것이었지요. 그러던 것이 요 근래에 다시 선명하게 회상되면서 마음을 휘젓습니다. 이제는 남아있는 시간마저 촉박하다는 인식 때문일까요?
사실은 그 날 우리 일행이 제2석굴암 앞 개울가에서 군용반합으로 밥을 지어 먹고 쉬고 있을 때, 마을의 버스 정류장을 슬며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막차로 들어온 버스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잔다는 한 주민의 귀띔에 기대를 걸면서, 차장소녀에게 잘못을 빌 작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버스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다음에 들어올 버스가 박차라고 했습니다. 그냥 돌아서는 길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야 무슨 방법이든 있었겠지만, 남녀의 관심이 지극히 조심스럽던 당시의 고등학교 일학년생의 숫기로는 한계점이었습니다.
그날의 여정을 둘러보고, 어쩌면 그때의 소년이 주인으로 있을 암자에서 그날처럼 하룻밤을 지내 볼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습니다. 암자는 사라지고 비로봉 등산로는 군사시설로 차단되었습니다. 시절도 변했습니다. 그때는 아침 안개 속에 철쭉꽃이 한창이었는데 지금 오월 중순에는 아카시아 꽃도 이미 끝물입니다.
우리들이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거나 변했습니다. 그래서 참회의 길마저 막혀버린 내 젊은 시절의 회한은 나의 마지막 날에 내가 고스란히 안고 가야 할 업보인가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