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의 졸업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나를 도시의 중학교로 진학시키려 하셨다. 이를 아신 할아버지께서 나를 사랑방으로 불러 앉히시고는 타이르셨다.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읍내의 중학으로 가도록 하라고 하셨다.
읍내는 자전거로 통학이 가능하므로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그런 다음에 면서기라도 하면서 적잖은 농사까지 경영한다면 그야말로 등따습고 배부른 일이라 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명망을 김 서기 어른에서 면장님 어르신네로 드높이는 것이 효도의 요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반면, 내가 대처로 진학한다면 아버지의 평생에는 허리를 펼 날이 없으리라 하셨다. 그러다가 자칫 문전옥답마저 날리게 되면 그것이 바로 패가망신이요 조상 만대의 불효라 강조하셨다. 맏아들인 나를 늦게 두신 아버지의 연세가 내년이면 쉰이라고도 하셨다. 그만한 나이의 이웃들은 농사 일선에서 물러나 앉아 손자들의 재롱이나 즐기면서 지내는데 나로 인해 그러지 못 하는 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면서 채근하셨다.
그러나 그때 나의 마음은 할아버지의 의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도리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저리도 고리타분한 말씀을 하실까 하면서 원망스러웠다. 내게 대한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진 할아버지의 박절(迫切)이 의아하면서 서운했다.
지금껏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배려는 각별하셨다. 해마다 초여름의 어느 날이면 할아버지는 나를 사립문께의 오얏나무 아래로 데려가셨다. 접근이 어려운 뒷담 쪽으로 들어가셔서 가지와 이파리를 헤치시고는 마치 감추어 두기라도 하신 듯, 새까맣게 익은 채 과분(果粉)을 뽀얗게 뒤집어쓴 자두 몇 알을 따내셨다.
그러고는 다른 식구들이 보기라도 할세라 하나씩 넘겨주시면서 당신의 면전에서 남김없이 먹게 하셨다. 그러나 가을바람에 떨어진 대추는 먹지 못 하게 하셨다. 기왕에 주운 것은 누나들에게나 주라고 하시고는 나무에 달린 채 굵고 곱게 익은 것들을 장대로 따 주셨다.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편애라 할 만한 배려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가끔 내게 “이눔아, 오늘은 할애비 방에서 자거라.”라고 하셨다. 그런 저녁이면 나는 으레 베개를 챙겨 든 채 사랑방 할아버지 옆으로 잠자리를 들었고, 다른 식구들은 나의 그런 행동의 의미를 훤하게 알고 있었다.
밤이 자시(子時)를 조금 지나면 어느 집안의 새댁들이 초롱불을 앞세우고 말소리를 죽여가면서 우리 집 사립문을 들어섰다. 막 끝낸 제사의 음식을 차려들고 동네의 노인들을 찾아보는 인사였다. 어머니가 받아서 사랑방으로 들이는 밥상에는 갖은 제물들이 빠짐없이 차려져 있었다.
약주와 안주감은 의당 할아버지의 몫이었지만 조율이시 과일과 오방색 유과는 의례건 내 차지였다. 거기에 어탕(魚湯)과 돔배기(돔발상어 산적)는 젯밥 야참의 별미였다. 사촌형들을 포함해서 스무 명도 넘는 종형제 중 오직 나만의 호사(豪奢)였다.
그토록 내게 끔찍하시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변심의 연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짚이는 바가 영 없지는 않았다. 아마도 앞집 신 씨네 때문일 것이었다. 그 댁의 셋째 아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살림살이를 말린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언젠가 그 댁의 막내아들이 자기 형의 사진을 보여준 일이 있었다. 한강 다리 밑에서 여자들과 보트놀이를 하는 모습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처녀들과 어울려 다녀도 되며 선생님과 맞담배질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려면 의당 돈이 많이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 집 사랑방이 밤마다 동네 노인들의 환담장소여서 할아버지는 소문의 근원에 더욱 정통하실 터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댁이 어렵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전지(田地)를 줄인 일은 없었거니와 우리 집 형편이 신씨네보다 못할 것도 없었으며 나의 대학진학은 아직 육 년도 더 뒤의 일이었다. 더구나 그 댁 아들의 대학 이야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할아버지의 표변은 지금껏 나에 대한 관심이나 말씀과 너무나 동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내가 우등상장을 타 올 때마다 할아버지는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거라면서 격려하여 주셨다. 그때 할아버지의 큰 인물이 기껏 면서기였을 리는 없었다.
언젠가는 크리스마스 씰을 선전하는 전단 한 장을 신 씨네 사랑방에서 가져오셨다. 사람의 흉부사진 밑에 ‘뢴트겐 사진’이라고 인쇄된 것을 가리키면서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독일의 뢴트겐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투시 사진이며 사진 속의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의 갈비뼈라고 말씀드렸더니 무릎을 치시면서 감탄해 하셨다.
칠십 노인들도 모르는 것을 겨우 열세 살인 내가 알았다고 감격하시면서, 역시 배워야 사람이니 공부는 끝까지 해야 한다고 내게 당부하셨다. 소위의 뢴트겐 사진이야 오학년 자연시간에 배운 것으로 별것이 아니었지만, 그때 할아버지께서 당부하시던 공부의 끝이 겨우 읍내의 따라지 고등학교였을 리는 천만 부당할 노릇이었다.
그럴수록 할아버지가 야속스럽고 내게 대한 마음을 고쳐 잡수신 여유가 더욱 궁금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를 잡고 물어보거나 하소연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아버지께 읍내로의 진학을 자청드릴 이치는 죽어도 아니어서 그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사랑방으로 불려 내려가시는 것 같았다. 필시 나에 대한 말씀이리라는 예감이 퍼뜩 들었다. 사랑채 뒤편의 변소를 다녀오는 척하면서 사랑방 옆문 밖에서 귀를 세웠다.
할아버지께서 말문을 여셨다. 엄청나게 비싼 월사금이며, 한 달에 쌀 서 말도 넘는다는 하숙비와 여비를 어떻게 감당할 작정이냐고 물으셨다. 더구나 견물생심이라고 손자인 내가 대학까지 넘보게 되는 날에는 도대체 어쩌려느냐고 심문하듯 따지셨다. 장손을 훈육하는 일이 어찌 그리도 경솔하냐면서 나무라셨다.
아버지가 차분히 말씀드렸다. 우리 집 형편에 대학이야 생심조차 가당찮은 일이라고 전제하시고는, 마침 내가 고만한 총기는 되는 것 같으니 사범을 졸업시켜 교사로 양성할 작정이라 하셨다. 경비가 조금 더 들긴 하겠지만 면서기보다 선생이, 면장보다는 교장선생님이 대우받는 실정이라고 설명하셨다.
더욱이 사범을 나와 교사가 되면 군대를 면제받는 바, 그렇게 되면 삼 년의 벌이로 육 년 동안의 비용을 벌충하고도 남으니 실은 그쪽이 더 경제적이라고 사뢰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도 더는 하실 말씀이 없는 듯 묵묵하셨다. 그러나 미심쩍기는 여전하다는 듯 입을 쩝쩝 다시시고는 마지막 일침을 놓으셨다. 살림을 일거에 망치려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서서히 말리려면 자식을 서울로 유학 보내라는 금언을 명심하라고……
야속하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오십 보 백 보였고, 그간 자랑스러웠던 장손의 처지가 불현 듯 서러웠다.
그 얼마 뒤, 나는 인근 도시의 사범병설중학교로 진학했고 할아버지는 나의 중학교 이학년 겨울방학 중에 돌아가셨다. 사범학교 또한 그 몇 달 후의 신학기부터 교육대학으로 대체되었다. 나를 사범학교에 넣겠다던 아버지의 계획과 할아버지에 대한 약조는 완벽하게 구속력을 벗어난 셈이었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게 되는 사람의 운명 같은 것. 그때 할아버지가 살아계시고 사범학교가 존속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초등학교 교사가 됐을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했다면 아버지는 나를 교사로 내보내셨을까, 아니면 대학진학을 권하거나 허락하셨을까?
내 나이 어느덧 예순도 넘는 날, 아내와 두 아들내외, 손자까지 모여앉아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문득 풀릴 것 같은 당시의 궁금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대견스러운 손자에의 배신(?)마저 서슴지 않으셨던 할아버지의 아들 사랑, 부자(父慈). 그리고 그때 나를 낙심시키면서까지 할아버지를 안심시키려고 극구 조아리시던 아버지의 효도, 자효(子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