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찾아가는 그들의 모습 앞에서 내가 가벼워진다.
완벽하게 무관한 공원의 인파 속에서, 바다로 떠난 그들처럼, 나도 외로운 만큼 자유로워진다. 포구 가득 피어오른 안개가 주위의 나무들마저 감춰 버리는 시간에는 무중력 상태처럼 편안해지기까지 한다. 그런 시간들이 좋아서 틈이 날 때마다 자유공원을 찾는다.
그리고는 해풍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제법 방만한 시간을 소비하는 사치를 누리곤 한다. 저마다 비밀장소를 마련해 두고 새벽이면 찾아가서 안개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바람에 실려 오는 대지의 숨결을 맞는다는 인디안 소년들처럼……
얼마 전 일이었다. 그날도 점심에 곁들인 반주의 기운도 날려 보낼 겸, 공원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참이었다. 광장 난간에서 도크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의 등 뒤로 한 떼의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나이 지긋한 일본인들이었다.
마침 갑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여객선을 가리키면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어디로 가는 배냐고 물었다. 그러나 깃발을 든 안내원은 겸연쩍게 웃기만 할 뿐, 대답을 못해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삼십 대 중반쯤으로 곱게 생긴 여자 안내원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기도 해서, 중국 산둥 반도로 가는 배라고 슬쩍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잡고 늘어지면서 간청해 왔다. 자기는 사무실 요원인데 마침 가이드가 모자라는 바람에 이들을 인천까지 인솔해 오기는 했지만, 도통 아는 것이 없으니 좀 도와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별 생각 없이 응낙을 표시하자, 일본인들이 눈치 빠르게 다가서면서 산둥 반도까지 거리는 얼마나 되느냐, 저 배의 속도는 몇 노트며 산동까지는 몇 시간이나 걸리느냐는 등 질문을 쏟아냈다.
대충 설명해 주면서 끝나는가 싶더니만, 이번에는 인천항을 갑문식 도크로 만든 이유가 뭐냐는 질문이 나왔다. 간조(干潮)와 만조(滿潮)의 차이가 커서 그렇다고 했더니, ‘간만의 차’는 뭐냐, 인천의 간만차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면 첫 번째는 어디냐는 등 그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무심코 둘러본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하지 않았다. 나를 향한 산책객들의 눈길이 곱지 않은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젊지도 않은 주제에 술기운까지 풍기면서 서투른 일본말을 지껄이고 서 있는 내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로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예민한 때이기도 했다.
무심결에 자초한 곤경이 후회스러워지면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곤혹 속에서 그들을 따돌릴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그들에게, 인천상륙 당시 맥아더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됐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십 대? 오십 대? 하면서 도리어 내게 묻는 대답들이 돌아왔다. 그의 당시 나이는 만 칠십 세가 넘었으며 동상 기단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하자, 그들은 탄성을 지르면서 동상 쪽으로 몰려갔다.
나는 이때다 싶게 광장을 떠났다. 나를 아는 이라곤 한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지금껏 살뜰하게 유지되어 온 내 자유의 울타리를 더는 손상시키지 않았음을 안도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잰 걸음을 걸었다.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관광버스 한 대가 내 옆으로 와서 멈추는 가 싶더니 창문마다 얼굴을 내민 일본인들이 하나같이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정말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주름진 얼굴마다 해맑은 미소들이었다. 안내원 여인의 고운 얼굴도, 내게 당한 따돌림마저 즐겁다는 듯 그들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나도 주위의 시선 같은 것들을 무시한 채 크게 외쳤다.
“나도 즐거웠습니다. 잘들 가십시오! 또 만납시다!”
끝까지 손을 흔들던 그들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을 때, 내 발길은 화교촌을 접어들고 있었다. 구한말 원세개(袁世凱)의 위세를 업고 바다를 건너와서 비단이장수와 청요릿집을 하면서 자못 호기롭던 청나라 사람들의 후예가 모여 사는 곳이다.
전 후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의 국적은 대만으로 바뀌었고 각박해진 생업 여건 속에서 거류민들의 숫자마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그런대로 자신들의 고등학교까지 유지하면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마을이다. 그러나 근래 인천에서 중국 쪽으로 부챗살처럼 퍼져나간 여객선 항로 덕택에 자못 활기로워진 모습이다.
여객들이 들여오고 내어 가는 물품들을 취급하면서 건물들의 붉은 벽과 간판들의 금빛 칠이 한결 선명해졌다.
그렇긴 하지만, 이양선의 포성이 가슴을 떨게 하고 놀라운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던 전전 세기말의 그것 같은 격동은 없고, 현대식 도크를 따라 동쪽으로 옮겨 가 버린 물류의 뒤안길에서, 주위에 흩어져있는 옛 일본 은행들의 지점이나 구 러시아의 영사관 건물들과 함께 고색(古色)만을 더해 가는 마을이다.
그런 포구의 한 자락에서, 중년을 훌쩍 넘긴 시간의, 갈매기 깃털만한 내 자유가 해풍에 나부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