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의 하늘이 이곳 객지의 하늘로 번져와서……
루쉰(노신:魯迅)의 연(풍쟁:風箏-연날리기)
삼월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부자연스러운 달이다. 입춘을 지난 지 달포나 되면서 절후 상 맏봄(맹춘:孟春)이라 하지만 사방 어디에도 봄의 기색은 없다. 삼동(三冬)을 지나면서 마음들만 조급해져 있을 뿐, 천지는 겨울의 한위(寒威)와 냉기를 그대로 머금은 것이다. 간혹 한낮의 기온이 제법 오르면서 성급한 기대를 부추기기도 하지만, 밤중의 한기는 엄동을 무색케 하는 것이어서 삼월은 미상불 부자연의 계절인 것이다.
그 해 삼월의 도쿄(東京)는 잿빛 하늘이었다. 월말께면 천지를 뒤덮는다는 벚나무들도 봉오리만 영근 채 잠에 빠져 있었고 날씨마저 스산해서 흡사 겨울의 풍경이었다. 당시 나는 어느 외항선에 견습 항해사로 승선 중이었고 일본은 난생 처음으로 밟아 보는 외국 땅이었다. 첫 기항지인 요코하마에서 손짓 발짓으로 지하철을 갈아타며 찾아간 유락쵸(有樂町) 인근의 일본 왕궁(皇居)과 주변 공원이었다.
사진으로 눈에 익은 궁성이 넓지 않은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을 뿐, 시가지의 분위기는 여느 도시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필시 궁성의 정문일, 해자 위의 좁은 다리가 닫혀 있었고 인적은 드물었다. 울울창창한 쓰시마(대마도:對馬島), 세계 제일이라는 야와다 제철소와 간몬(關門)해협 양안의 불야성, 호수 같은 세토내해(瀬戸內海)의 그림 같은 해안 풍광을 스쳐 지나면서 팽창했던 기대가 오히려 무안해지는 정경이었다.
내일이면 도쿄를 구경시켜 주리라던 선배 항해사의 호의를 기다리지 못한 조급성이 뉘우쳐지면서, 돛폭만큼 부풀었던 나의 첫 해외 나들이가 잿빛 하늘 밑 회색 벤치 위에서 우울하고 외로웠다.
해자의 수면을 떠도는 오리 떼의 유영을 지켜보면서 돌아갈까 말까를 저울질 하는 중에 인기척이 있었다. 대학생 같기도 하고 직장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일본인 여성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하얀 스타킹, 굽 낮은 검정 구두 차림새가 단정했다. 내게 길을 묻는 표정이었다가 미안해하는 모습으로 돌아서려는 그녀를 잡아 세웠다. 그러자 그녀도 내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는 뭐라도 도와주려는 눈치였다.
“마이 네임 이즈 미야코 마에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그녀 또한 그럴 것이어서 두 벙어리들의 냉가슴만 쑥스러우면서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녀가 손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녀가 ‘仕事（시고토:しごと=일）? 職業（쇼쿠교우:しょくぎょう=직업）?’ 이라고 쓰면 나는 ‘한국해양대학생(韓國海洋大學生)’이라 적었고 그녀는 그 옆에다 ‘동경경시청(東京警視廳)’을 적어 넣으면서 자신의 직장을 소개했다. 상당한 달필이었다. 그녀가 ‘何爲來(무슨 일로 왔어?)’ 라고 물으면 ‘승선실습차(乘船實習次)’라고 대답하면서 영 ․ 한(英漢) 혼용에 몸짓까지 동원된 종합언어(?)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가 어디를 구경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앞쪽의 표지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긴자(銀座)’라는 글씨가 화살표와 함께 박혀 있었고, 그녀는 버스를 갈아타며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림엽서에서 봤던 원통형 빌딩과 미츠비시의 엠블럼. 일본의 대표적 번화가인 긴자 거리가 틀림없었다. 도로와 건물들이 서울의 그것보다 넓고 높긴 했지만 별나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둘러보는 거리의 풍물들은 새롭고 신기했으므로, 우리들은 토요일 오후의 긴자 거리를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으로 거닐었다. 그러면서 길거리 벤치에 나란히 앉아 제법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번화가를 벗어난 골목길 식당에서 일본식 우동으로 점심을 들기도 했다. 여학생처럼 단정하면서 뽀얀 얼굴이 갸름한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그녀가 또다시 나를 어디론 가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하철을 갈아타면서였다. 요코하마까지 나를 바래다주는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다카시마야(高島屋)라는 백화점이었다. 뜻밖의 일이었지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태였다.
그때 그녀는 내게 어느 곳을 구경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것이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들었을 것이었다. 요코하마의 ‘다카시마’ 부두에 정박 중인 배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의 대답을 같은 이름의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싶다는 뜻으로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필담의 혼선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처음 타 보는 에스컬레이터로 층층을 오르내리면서, 자태 고운 안내 아가씨들의 음성 맑은 친절이 감미로웠다. 덕분에 백화점을 나왔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돌아갈 시간이 촉박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도중, 그녀가 나를 기다리게 하고는 한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짚이는 바가 있어서 뒤를 밟아 보았더니 예상대로였다. 그녀가 거리로 나오자,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세워 둔 채 가게를 다녀왔다. 그러고는 잠시 후 서로가 똑같은 포장의 초콜릿 케이스를 동시에 내밀면서 마주 웃었다. 그러나 내가 지하철 개찰구로 들어섰을 때는 그녀도 아쉬운 듯 오른손을 들었다. 그렇지만 내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서로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튿날은 정복차림으로 배를 나섰다. 아름다운 그녀와 근사한 사진도 찍고 격조 있는 장소에서 식사도 함께 하고 싶었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하역작업이 없었으므로 선배 항해사가 통역으로 동행해 주었다. 도쿄행 지상철(地上鐵)을 경쾌하게 달리면서 눈 아래 펼쳐지는 세상이 온통 나를 위해 있는 것만 같았다.
약속 장소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니 올 리 없다면서 두 시간을 기다렸을 때, 선배 항해사가 물었다. 약속시간이 틀림없느냐고……. 내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바로 이곳 궁성 정문 앞의 열두시가 확실하다고……. 그러자 그의 눈빛이 다급해지면서 나를 끌었다. 어제부터 닫혀 있던 그 좁은 다리가 정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숨 가쁘게 달려간 정문께 에도 그녀가 없었다. 교각 사이가 안경알을 닮은 이중교(二重橋)만 해자를 가로질러 빠끔할 뿐 많지 않은 산책 인파 속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낮은 잿빛 하늘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날 저녁 요코하마의 부두길 주점에서 밤을 새워 마시면서 너무나 억울하고 비통했다. 다음 항차에는 반드시 그녀를 직장으로 찾아가리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그녀를 향한 내 마음도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엇갈린 사태는 마음 같지 못했다. 그때 나는 실습선을 바꿔 타게 되면서 일본 기항이 멀어졌고, 일 년의 실습기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 버렸다.
남은 학업과 군대를 마치고 삼등항해사가 되어서 일본을 들렀을 때는 그녀가 직장을 떠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결혼을 한 뒤였고 그녀 또한 가정을 이루고도 남았을 때여서, 그녀의 잠적이 그리 애석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는 못 돌이킬 회한의 추억만 애틋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그녀를 찾아가서 본의가 아니었던 나의 위약을 사죄하면서 그녀의 용서로 내가 가벼워지리라 했다.
그로부터 삼십팔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해마다 삼월이면 그때의 잿빛 하늘이 이곳 서울의 창공으로 물결쳐 와서 감당하기 어려운 갈증으로 젖어들곤 한다. 지금껏 미제(未濟)로 남아 있는 내 젊은 시절의 업보가 원금에 복리의 복리를 보탠 중압으로 조여든다.
모든 것은 무위의 세월만 흘러 보낸 내 자업의 자득이긴 하리라. 그러나 지금 당장 그녀를 찾아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그럴 방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도쿄의 거래 회사나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당시 경시청에 근무했던 그녀의 종적을 조회한다면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로 인해 파생될 사태가 두려운 것이다.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 있어서 지난 일을 소상하게 기억한다면야 이에 더할 보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두 손을 부여잡고 지난날의 실소를 사죄할 것이다. 그러면서 남은 세월의 우정(?)을 고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만약에라도 그녀가 당시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면……. 그것만은 상상조차도 하기 싫은 것이다. 지극히 애틋해서 억울하기까지 했던 내 젊음의 몸부림과 그로 인한 회한의 추억들이 또 한 번의 잿빛 하늘처럼 무너져 내릴 테니깐…….
그런 자해의 아픔만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 숨어 버리고 싶지만, 주위는 아직도 명명백백한 엄동이어서 무서운 한파만 몰아칠 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의 잿빛 삼월은 한량없는 우울과 비애로 출렁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