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 온 아파트의 후문 밖은 나지막한 시가지였다. 기껏 이삼 층의 연립 아니면 단독주택들이 왕복 이차선이나 될까 말까한 이면 도로 양편에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다. 드넓은 간선 도로변에 고층빌딩들이 즐비(櫛比)한 정문 쪽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분위기였다.
그곳에 장(場)이 서고 있었다. 별도의 장터랄 것은 없고, 가로변의 점포와 난전(亂廛)들이 간단한 의 ․ 식 ․ 주 용품들을 팔고 있는 간이시장이었다. 그러나 정육점과 야채가게, 옷가지 점포와 양은그릇전 등, 재래시장의 기본 구색만은 손색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개나리 울타리가 샛노랗게 피어난 아파트 쪽 인도에는 어물전이 벌어져 있었다. 오십대 중반쯤의 사내가 이동 점포로 꾸며진 리어카를 길가에 받쳐 둔 채, 고등어, 낙지, 갈치 등의 스티로폼 상자들을 진열하고 있었다. 코다리 명태와 미역오리, 양미리 두름들은 리어카의 기둥과 횃대에 걸어 두고 있었다.
지나치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러면 그는 이제 동태가 막물이라느니, 곧 동해의 햇꽁치가 입하되리라느니 하면서 장보기 정보를 전하곤 했다. 해맑은 골목동네의 봄볕 다사로운 정경이었다.
나는 그곳, 어린 벚나무 몇 그루가 터질 듯한 꽃망울들을 부풀리고 있는 아래 벤치에서 햇볕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기생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 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배를 타고 있는 현역 선장을…….
오랜만에 그의 전화를 받은 것은 달포 전쯤의 어느 밤중이었다. 일부변경선을 서쪽으로 넘자니 잃어버린 하루가 억울하다고 농담하면서, 이번에 귀국해서 하선(下船)을 하면 정년퇴직 이전의 마지막 연가(年假)가 될 것 같으니 꼭 한 번 만나자던 전화였다.
그랬던 그가 오늘 다시 전화를 걸어 온 것. 마침 서울의 아들네에 다니러 와 있다고 했다. 나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내 아파트의 위치를 그의 아들 내외가 안다면서, 두어 시간 뒤쯤 후문께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우중충한 실내에서 무료하게 기다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약속 장소로 뛰쳐나온 참이었다. 정확한 시간의 지정도 없는 약속이 조금 막연하긴 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두어 시간쯤이야 충분히 감미로울 것 같았다. 그것도 찬란한 사월의 햇살 좋은 첫 토요일 오후의 벤치임에.
해가 제법 기우는가 싶더니 예의 리어카 어물전이 부산해졌다.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이 리어카에 둘러서면서 사내의 손길이 바빠졌다. 그러자 건너편 길가에서 푸성귀를 팔고 앉아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스스럼없이 달려와서 거들기 시작했다. 도마를 헹구고는 사내가 갈고리로 던져 주는 생선들을 다듬고 포장해서 손님들에게 넘기면서 수금까지 알아서 척척 하는 것이었다.
시장 상인들끼리의 품앗이이긴 하겠지만 가족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협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격의 없는 사이로 지내고 나면 저리도 친숙한 이웃이 되는 것일까? 그들 삶의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그러기를 시간여, 어물전이 조금 한가해지자 아주머니는 다시 제 자리로 건너가서 앉았다. 그녀의 대바구니에는 쑥, 냉이, 달래 등의 봄나물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꼭 이십칠 년 만에 만나게 되는 내 친구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건장한 체구에 시원시원 우렁찬 음성일까? 그러나 그로서도 풍파의 세월에 바란 외피의 탈색과 손상만은 어쩔 수 없겠지. 그래도 해발 10미터 대기 속의 활성 오존에 씻기고, 새벽과 해으름의 항성(恒星)들을 좇으면서 단련된 두 눈이야 평소처럼 푸르고 맑게 빛나리라. 그러면서 물이랑을 닮은 주름살마다에는 북빙양의 해초 냄새가 배어 있을까?
땅거미가 내리면서 행인들의 발길마저 뜸해지자, 아주머니가 다시 리어카로 건너왔다. 이번에는 자신의 빈 바구니 몇 개를 포개어 들고서였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길 위의 생선상자들을 걷기 시작했다. 사내가 아직은 이르다며 언성까지 높였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 오늘은 행복한 날이에요. 나도 가져 온 것 몽땅 팔았고 당신도 무척 많이 팔았잖아요. 그러니 여보, 우리 오늘은 이만 하고 내일 다시 나와요.”
그래도 사내가 뜨악한 얼굴이자, 아주머니는 검은색 비닐봉지 하나를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당신 대접하려고 소주도 한 병 사 놨어요. 달래 냉이도 제일 좋은 놈으로 조금 남겨 뒀고요. 당신 된장찌개 좋아하잖아요. 여보, 제발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서 쉬면서 소주라도 한 잔 하시고 봄 기분도 내어 보세요.”
그러자 사내는 못 이기겠다는 듯, 묵언의 동의를 보내면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내 가뿐해진 리어카를 사내가 끌고 나서자, 아주머니는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사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량들이 뜸해진 맞은편 도로의 한복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림으로 잡아도 이제는 친구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는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삼십육 년이나 몸담았던 항로와 해안, 거기서 흘려보낸 세월의 애환일까? 아니면 천직으로 신봉했던 항해, 그것마저 거부당하는 정년 후의 설계를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아마도 후자일 것만 같다. 어쩌면 이제 그것만이 그와 나의 공통 화두일 테니까.
그도 강원도 어디쯤의 전원살이를 계획하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껏 항해를 하면서 그가 봐 두었던 남반구의 어느 한적한 섬나라라도 들고 나올까? 혹은 아직도 해운대의 달맞이 고개를 생각하고 있을까?
언젠가 내가 부산에서 살고 있을 때, 동기생 친구 몇 명이 청사포 횟집마을을 다녀오던 길에 그가 차를 세우면서 말했다. 항해를 끝내는 날, 그곳 달맞이 고개에서 살고 싶다고. 작은 농장이라도 가꾸면서 아침저녁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마중하고 싶다면서. 그런 틈틈이 배율 높은 쌍안경으로, 항구를 들고 나는 외항선들의 선적항(船籍港)을 살피리라 했다.
그러나 이제 그곳에는 농장은커녕 쌍안경 하나를 들이밀 공간조차 없어져 버렸음을 그가 알고 있을까.
어서 빨리 그를 보고 싶었다. 그가 도착하면 바로 시장 안 어디쯤에 있을 것 같은 식당으로 동행 하리라. 나도 달래 냉이 된장찌개를 시키고 소주잔을 주고받으면서 밤늦도록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리라.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는 아직 오지 않았고, 맞은편 도로 끝의 낮은 산위로 마지막 저녁놀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그 아래로 달팽이집 같은 어물전 리어카가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활짝 핀 백목련 한 그루가 지붕보다 높게 솟은 어느 이층 양옥집 앞을 지나 긴긴 그림자를 끌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