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파란 하늘의 밝은 햇살이 따갑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숙집 안마당의 샐비어 꽃대들이 서럽도록 붉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만 싶었다. 그럴 때면 내 악동(?) 친구들을 불러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들 또한 고만한 시절의 가을을 나처럼 앓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 우리들의 행사는 바로 무전여행이었다. 맨몸으로 고생을 사서 겪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은 주체하기 어려운 젊음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우리들 나름의 방책이었다. 기왕 신고 다니는 워커 군화에 야전용 반합(飯盒)과 담요로 꾸린 군용 배낭만 메고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힘겨운 증기 기관차가 갈 짓자 행보로 숨차게 찾아들던 태백산맥, 통리 아니면 상고사리 혹은 하고사리. 산중이 깊으면 깊을수록 좋았다. 하늘 밑 무인지경에서 야수처럼 포효하고 뒹굴면서 우리들끼리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동쪽으로 산맥을 넘어서면 하늘과 맞붙은 마다는 한량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물결이었다.
그날도 묵호항 바닷가에서 야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엄청나게 큰 상선 한 척이 방파제를 지나 항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드높은 수직 선수(船首)가 해면을 가르면서 느릿느릿 다가와 부두에 접안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산처럼 막아서는 선체의 위용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우리들에게 배 위의 누군가가 올라오라는 손짓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 배의 삼등항해사였다. 그의 안내로 둘러본 선체가 대단했다. 갑판은 웬만한 운동장이었고, 열기와 굉음에 싸인 기관실은 몇 층짜리 대형 공장 같았다. 그의 침실 겸 집무실 또한 넓고 으리으리해서 배 위의 이모저모가 마치 딴 세상처럼 신기하기만 했다.
삼등항해사가 사진첩 하나를 내어놓았다. 그의 대학 졸업앨범이었다. 야자수가 늘어선 어느 외국의 바닷가에서 비키니 차림의 금발 미녀들과 웃고 서 있는 해양대학생들의 제복 입은 모습이 멋있고 부러웠다. 원양항해 실습 차 들른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이라 했다.
사진에 정신을 팔고 있던 친구 하나가 무심결에 말했다. 자기도 해양대학에 가고 싶다고. 그러자 삼등항해사가 비아냥스럽게 받았다. 네놈들처럼 무전여행이나 다니는 주제에는 쉽지 않을 거라고. 그때 전화가 걸려 왔고, 삼등항해사는 선장실을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방을 나섰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그냥 떠나기는 미흡해서 내가 몇 자를 적었다. 배를 구경시켜 줘서 고마웠으며 해양대학이 제법 괜찮은 것 같긴 하지만, 후생가외(後生可畏)의 이치도 몰라서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대학이라면 별일 없다고…….
그로부터 며칠 후, 내 하숙집으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겉봉이 ‘석탄공사 부사지점 장성호 삼등항해사 황영두’로 되어 있었다. 그날은 선장실에서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결례가 되었다면서 그때 자기로서는 우리들을 분발시키려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니 양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동생처럼 사귀고 싶다고 했다.
다시 볼 것 같지 않았던 그의 뜻밖의 제의에 조금 겸연쩍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우선은 서울의 초일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다에 뜻을 두고 해양대학을 지망했다는 그가 멋있었다.
그리고는 그때 그로부터 받은 모욕을 그에게 돌려주려는 내 오기였다. 나의 해양대학 합격증을 그에게 보내리라는 심중의 계획이었다. 그것은 실제 진학과 관계없이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의 입학시험이 특차였으므로.
그는 자주 편지를 보내어 해양과 항해의 중요성을 설명하곤 했다. 삼면이 바다요 북쪽은 막혀 있는 우리의 나아갈 길은 바다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콜럼버스, 마젤란 등 위대한 항해사들 이야기며, 원양항해의 지표가 되는 별자리 이름들을 전해 오기도 하였다.
그의 편지들이 재미는 있었지만, 꼬박꼬박 답장을 쓰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다. 횟수가 늘어나면서 글감이 궁해지면 나는 장난기 섞인 내용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황영두 항해사님, 지금쯤은 남포동의 어느 바에서 가련한 마담의 수호자가 되어 그녀를 괴롭히는 악당들에게 정의의 주먹을 날리고 있겠지요?’ 라고. 그러면 곧바로 그의 답장이 돌아왔다.
장 동휘, 박 노식 등 몇 몇 배우들이 스크린 상에서 벌이는 활극은 항해사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항해사는 국가 무역전선의 첨병인 동시에, 외교관계 조차 없는 미지의 나라들을 제한 없이 드나드는 민간 외교관(?)이라는 것이었다.
항해사에의 호감과 함께 해양대학에 대한 관심이 나도 모르게 부풀어 갔다. 재학 중 일 년의 원양실습 기간에는 세계를 일주한다는 입시 요강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의식주 일체와 수업료가 국비라는 특전이 파격적이었다. 나라가 궁핍하고 너나없이 어려웠던 육십년 대의 중반이었다.
입학시험은 1월5일이었다.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있었지만 캠퍼스도 구경할 겸 부산 응시를 택했다. 한겨울이건만, 상록 활엽수들과 동백꽃이 어우러진 남국적 분위기가 좋았다. 수평선이 내다보이는 강의실도 맘에 들었다. 그러나 경쟁률이 만만찮았고 내 답안지에 자신이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고향마을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전기 대학의 원서 접수 차 서울로 가려는 참이었다. 우편배달부가 다가오더니 전보가 왔다면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축 합격’ 이었다. 응시 기간에 숙박했던 하숙집에서 발표 당일에 보내 준 뜻밖의 호의였다. 나는 버스를 포기한 채 집으로 내달렸다. 아버님께서 무척 좋아하시리라 생각하면서…….
2월1일의 가 입교에 따른 한 달간의 특별훈련이 있었다. 제법 혼쭐을 내는 과정이었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훈련이 끝나면 자랑스러운 제복을 입게 된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이제 곧 나의 정체를 황 영두 항해사에게 드러내면서 완벽하게 설욕을 하리라는 포부 또한 절실했다.
정식 입학 후, 캠퍼스의 규율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황영두 항해사를 찾아 나섰다. 알 만한 선배 지도관에게 그의 근황을 문의했더니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죽었다고 했다. 그의 대장(大腸)을 수술한 집도의가 수술용 가위를 남겨 둔 채 봉합해 버린 실수의 결과라 했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사인과 요절이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내가 허탈했다. 그러나 한편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것이 다 운명이며 인연인가 싶었다. 그와 나의 그것들이 절묘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 서로 엉킨 것.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가 비운 자리로 끌려든 것인가.
그러고 보니 그때 묵호에서 봤던 장성호는 낡은 소형선에 지나지 않았고, 해양대학의 원양실습이니 제복 같은 것도 별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때 내 눈과 마음이 뒤집혀져 있었던 것인가. 거기에 설익은 오기가 부채질을 보태고……. 무릇 인연이란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런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