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백칠십사 년 삼월, 나는 대한해운공사 소속 세종호의 일등항해사였다.
미국 플로리다 주의 잭슨빌에서 칼륨(Potassium) 만 팔천 톤을 싣고 인천으로 항해 중이었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카리브 해 쪽으로 침로를 바꾸려는 순간, 본사의 전문이 날아왔다. 마이애미 항으로 들어가서 연료유를 보충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파나마의 동쪽 관문인 크리스토발 항에서 운하 통과 순서를 기다리면서 기름을 받던 평소의 관례상 뜻밖이었다. 더구나 배의 위치는 하루 정도의 항로손실(Deviation)이 불가피한 해점(海点)이었다. 그러나 배를 돌릴 수밖에. 그 몇 개월 전의 제1차 석유파동으로 지구상의 유류 수급이 원활치 못하던 시절이었다.
마이애미는 자그마한 항구였다. 진입 수로가 마치 운하처럼 다듬어져 있었고 양 안의 파란 잔디밭 위에 하얀 별장형 목조 가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배의 선수루(船首樓)에서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잔디 마당에 여인들이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알몸인 듯, 배가 접근하면 타월로 몸을 가렸다가 지나쳐 멀어지면 도로 걷어내곤 했다. 초입부터가 말로만 듣던 휴양지 마이애미였다.
무역항도 아닌 마이애미를 단지 급유차 들른 것은 행운이었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마이애미 비치’를 보고 싶었다. 실습생들을 포함한 네댓 명이 해수욕까지 하고 올 요량으로 배를 나섰다.
해변이 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수욕장 치고는 낯선 풍경이었다. 호텔인 듯 치솟은 건물들과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연해 있는 백사장이 한적했고, 수영중인 사람들은 드물었다. 우리들이 빌리려던 비치 파라솔도 없었거니와 포장을 둘러친 탈의장이나 샤워장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나치는 산책객에게 수영복은 어디서 빌리고 갈아입느냐고 물었더니 못 알아듣는 표정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복작이는 우리네의 해운대가 아니었다. 탈의실 겸 샤워장에서 수영복을 빌려 입고, 금발의 미녀들이 출렁이는 모래밭에서 한나절을 소풍하려던 우리들의 호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망상이었다. 허탈하고 부끄러웠다.
도로 옆 공원 벤치에 앉아서 김밥을 먹고 있는 우리들을 행인들이 흘끔거렸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까맣게 차린 동양인들이 새까만 무엇을 삼키고 있는 모습이 그들에겐 동물원의 구경거리처럼 신기했을까?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어색한 정장에 졸라맨 넥타이, 수직으로 작열하는 태양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시 빨리 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 목이 말라 왔다.
나의 갈증과 그로 인한 표정을 읽었음인지 후배 기관사가 단말마(斷末魔)의 오기를 터뜨렸다.
“형님, 우리 호텔에서 자고 갑시다. 까짓 거 해봤자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기도 못 되는 무지의 객기임을 내가 알고 있었다. 아침에 입항 수속 차 승선한 대리점 직원에게 참고삼아 물어봤던 것. 그곳의 해변 리조트들은 최소 여섯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하루 숙박비가 이백 달러를 넘는다고 했다. 그것은 내 한 달 급여의 절반과 비슷한 액수였다.
한화 약 오백 원이 미화 일 달러와 교환되던 당시의 내 월급 십구만 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내의 웬만한 기업체 사장의 봉급을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나라의 형편은 궁핍한 반면, 외항 선원들의 급여체계는 국제운수연맹(I.T.F)의 권고를 따라야 했던 여건 탓이었다. 따라서 내가 속해 있던 해운공사의 신참 선장들의 월급이 당시 사장의 그것보다 훨씬 높았다.
그때의 세태를 반영하는 일화가 있었다. 부산의 ‘동명목재’는 해마다 오백만 불 이상씩 수출하면서 국내 수출 1위를 견지하는 굴지의 기업이었다. 그 회사의 강 모 사장은 직원들의 급여를 결재하는 날이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 자기보다 많이 받는 부하들 때문이었다. 합판 제조용 나왕(Lauan) 등 남양재를 실어 나르는, 기껏 오륙천 톤 소형 선박들의 선장과 기관장이 바로 그들이었다.
국내에서는 그들에 비견할 만한 내 한 달 급여가 이곳의 하루치 숙식비나 될까 말까한 현실이 새삼 구차했다. 그것으로 계를 붓고 적금을 넣으면서 희망에 들떠 있을, 지구 반대편의 아내가 불현듯 불쌍했다.
배로 돌아왔더니 미국인 경관 두 명이 승선해 있었다. 쇼핑에서 막 돌아온 듯한 선원 한사람과 그의 소지품들을 잡아놓고 있었다. 선원이 도심 길가의 잔디밭에 오줌을 눈 혐의라 했다. 그러고도 일체의 질문에 “노”라고만 대답하는 그의 상륙허가증을 보고 배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런 것은 필요치 않고 자기들 두 사람의 목격만으로 충분하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만 잡아 놓고 앉아 있는 그들이 이상했다.
실은 선원이 무척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쇼핑을 마친 그가 백화점 뒤 한적한 골목에서 실례를 하면서 돈을 세고 있는 모습을 그들이 본 것. 같지도 않은 황인종 녀석이 자기들도 놀랄 만한 현찰을 세고 있는 장면은 도둑의 의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심증뿐이었으므로 백화점에 연락을 넣어 둔 채, 그들의 마감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태를 짐작할 만한 내가 아부를 자처하고 나섰다. 너희 나라의 제품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이를 사려고 선원들이 돈을 갖고 다닌다면서.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여덟시가 지나고서야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면서 돌아가는 그들 앞에서 내가 도리어 초라하고 서글펐다.
그들이 떠나자 이번에는 백인 할머니 한 분이 눈물을 글썽이며 찾아왔다. 선원 중 누군가로부터 강아지를 돌려받아야 한다면서 울먹였다. 점심나절에 자기 집을 방문했던 어느 선원에게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로 주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이 극구 반대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뿐인, 아시아의 최빈국인 동시에 개를 잡아먹는 미개의 나라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도 내가 중재하고 나설 수밖에. 한국이 그렇게 형편없는 나라가 아니며 보신탕의 풍습은 전설 속의 이야기라고. 그래도 할머니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은 강아지를 안은 선원이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해야만 했다. 잘 키운 다음에는 결혼을 시켜서 후손을 번성시킬 것이며 개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십자가를 세울 것이라고……. 그런 다음에도 할머니는 연방 뒤를 돌아보고 눈물을 닦으면서 트랩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요트의 돛폭들이 밀림처럼 빽빽한 해안을 헤쳐 나오면서 남모르게 서러웠다. 덩그런 선수루의 새벽안개 속에서, 단군할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그렇게도 척박한 땅에 후손을 퍼뜨렸을까 하는 철부지의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과 삼십여 년 전, 내가 스물여덟이던 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