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초 어느 일요일, 부산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이른 아침나절에 집을 나섰다. 활짝 피어난 개나리 울타리 위로 실파 같은 가랑비가 내려앉고 있었다. 가늘고 성근 빗줄기는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내 우산 위에서 송알송알 맺히기만 할 뿐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아직은 한산한 도로 저편에서 희뿌연 안개를 뚫고 택시 한 대가 달려와서 멎었다. 말쑥한 개인택시였다.
차 안에는 오래 전에 유행했던 서양 팝송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귀에 익은 가락이 반가웠다. 그러나 뒷모습만 보이는 운전수의 연륜이 팝송의 연대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의 나이를 물어 봤다. 그러자 나이는 왜 묻느냐면서 뒤돌아보는 운전수의 얼굴이 생각만큼 젊지는 않았다. 연유를 알고 나서 알려 준 그의 나이는 나보다 적지 않았다.
내가 나이를 밝히면서 통 연령이 끝나자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젊었던 시절의 팝송들이 좋아서 종일 테이프만 들으면서 운전을 한다고 했다. 나 또한 그 시절의 노래들이 좋고 오랜만에 대하는 곡이 무척 반갑다고 하자, 그가 스스럼없이 말했다. 요즘의 노래라는 것들이 그게 무슨 노랩니까? 젊은이들의 정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가 대꾸했다. 그야 모를 일이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까요. 햄버거나 피자 같은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말을 받았다. 그래 봤자 패스트푸드일 따름이에요. 진지한 맛이 없어요. 젊은이들의 정서가 삭막해진 탓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시험에만 휘둘린 나머지 무슨 독서를 했습니까. 아니면 제대로 된 음악이라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요즘은 음악시간마저 입시에 동원된답니다. 그래도 우리들 시절에는 음악시간이면 교정이 울리도록 합창을 하곤 했잖아요? 국내 가곡은 물론이고, 먼 산타 루치아, 켄터키 옛집, 금발의 제니, 스와니 강,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 서양의 그것까지 말입니다. 어쨌든 옛날 팝송들은 노랫말에 서정이 있었고 가수들의 가창에도 성의가 들어 있었어요.
빗줄기가 조금 굵어져 있었고 택시는 올림픽도로로 굽어 오르고 있었다. 인터체인지 기슭의 산철쭉 아니면 영산홍이 여인네들의 연지붓 같은 꽃망울들을 뾰족뾰족 내밀고 있었다. 앙상하게 드러난 회백색 밑동과 가지들이 미당 시 ⌜영산홍⌟의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의 다리와 발가락을 닮았다.
영산홍 꽃잎이 피어나면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 모습일까? 회청색 한강이 가랑비를 맞고 있었고 테이프의 음악은 새로운 곡으로 넘어들고 있었다. ‘에버그린 트리’의 애잔한 가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클리프 리차드라는 가수가 불렀던가?
당시에는 다방이 유일한 음악 감상 장소였어요. 그랬지요. 음악감상실이라는 곳도 있긴 했지만 그 역시 다방이었지요. 전축이 비싸서 그랬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전축이 있는 집은 드물었어요. 전축도 전축이었지만 레코드 판 구하기는 쉬웠나요? 당시 양판이라 해 봐야 대부분이 복사판이었지만 그나마 귀하고 비쌌어요. 원판은 하늘의 별따기였고요.
그래요, 그때는 서양 음악을 양판이라 불렀고 오리지널 디스크는 원판이라고 했어요. 당시의 음악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차 한 잔을 시킨 채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서 다른 손님들이 신청한 곡을 듣기도 하고, 듣고 싶은 곡을 신청하기도 했거든요. 다방 레지들이 좌석을 돌면서 신청곡 주문을 받았고요. 당시의 디스크자키 또한 명물이었습니다. 하나같은 장발에 바람이 새는 듯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능청을 떠는 모습이 밉지 않았어요.
엷은 물안개에 덮인 채 가랑비에 젖고 있는 한강, 샛노란 개나리 밭 사이로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고 있는 올림픽도로를 달리면서 택시 주인과 나는 마치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낸 친구라도 되는 듯,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야기를 꺼내고 맞장구치면서 옛 시간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때는 다방에서 모닝커피도 팔았어요. 커피 속에 생 계란노른자 하나를 넣어 주는 거였지요. 열 시까지만 나오는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초침을 다투면서 달려들곤 했지요. 계란 반숙도 있었고 위스키도 팔았어요. 토리스 아니면 도라지 위스키였습니다. 유리 나팔잔을 넘칠 듯 찰랑거리는 위스키 한잔에 얼음 설탕물 한 글라스가 안주 겸 입가심으로 따라 나왔지요. 슈가워터라고요. 홍차에 위스키 두어 방울을 떨어뜨려 주는 위티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가랑비는 변함없이 내리고 있었고 테이프의 음악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앞쪽 저만치에 수북이 피어오른 물안개 위로 한남대교가 공중에 뜬 듯 가로질러 있었다. 기왕이면 남산 순환도로로 가는 것이 어때요? 택시 주인이 오랜만에 뒤로 돌아보면서 물었다. 좋고 말고요. 내가 지체없는 동의를 보냈다.
그때는 다방이 바로 동네 사랑방이었어요.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는 으레 다방이었고 집이나 사무실로 찾아온 손님들까지도 다방으로 데려가서 대접하곤 했거든요. 사랑방의 지배인은 카오마담(얼굴마담)이었고요. 언제나 코버선에 굽 높은 샌들을 신고 바닥에 끌리는 치마꼬리를 옆구리에 감아 쥔 모습으로 종종거리며 손님들의 좌석을 넘나들었지요. 얼굴도 예뻤지만 한복을 입은 몸매들이 늘씬했어요. 카오마담은 일본말 뜻 그대로 다방의 얼굴이었습니다. 주인마담이야 카운터에서 백색전화기만 지키고 앉아 있었지요. 맘대로 사고 팔 수 있는 백색전화가 당시에는 가보(家寶) 제 1호였습니다.
젊은이들의 좌석은 반드시 맨 안쪽의 구석 자리였습니다. 연인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긴 스커트에 뾰족 뒷굽의 하이힐과,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이었고요. 당시에야 어디 요즘 같은 캐주얼 복장이 있었나요? 학생들의 교복이 바로 외출복이었던 시절 아닙니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젊은이들의 모습이 정중했지요. 요즘처럼 남녀가 나란히 앉는 법도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히히덕거리는 모습은 있을 수 없었지요. 반드시 시집 한 권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앉아 있는 처녀들이나, 타임지 아니면 뉴스위크 같은 서양 잡지를 들고 다니는 총각들의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말입니다.
택시는 이전에 제3한강교라 불렀던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 중허리를 감아 돌고 있었다. 개나리 꽃가지들이 폭포처럼 드리워진 담벽 너머로 진달래가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터질 듯 부푼 벚나무 꽃망울ㄹ들이 가랑비에 젖어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나면 바로 만개로 이어질 것 같았다.
택시 주인이 말했다. 참 좋은 아베크 코스였습니다. 인적이 드물어서 팔짱을 낀 연인들이 거닐기에도 좋았지만 벤치에 앉아 건너다보는 한강과,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의 불빛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서 한강이 보이지 않아요. 강변의 아파트들이 강을 막아 버린 겁니다. 그것 아니더라도 한강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뭅니다. 매연으로 시계가 흐려진 탓이지요.
높은 건물들 사이 좁은 골목을 돌아 넓은 도로로 나왔을 때, 꿈결처럼 감미로웠던 옛 시절은 종적없이 사라져 버리고 운전수와 나는 번잡한 차량 행렬의 날카로운 소음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서울역 앞 택시 승강장으로 들어섰다. 주위의 초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더욱 납작하게 눌러앉은 잿빛 역사(驛舍)가 빗물에 젖어 있었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향수인 양 애수를 머금었다.
문을 열고 내려서는 내게 그가 말했다. 좋~겠습니다. 이런 날에 기차여행이라니요.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새마을호는 타지 마세요. 준급행 정도가 좋아요. 맥주라도 두어 병 창턱에 세워 두고 말입니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도 도로로 내려서면서 손을 흔들었다. 차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올 포 더 러브 오브 어 걸.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이라고 했던가? 가랑비는 여전히 나긋나긋 내려앉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