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뒷산을 다녀올까 하고 거실로 나섰더니 무슨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주위의 산자락에 흐드러진 아카시아 꽃이려니 했다.
사실은 어제 새벽에도 그렇게 지나쳤던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심쩍은 데가 없지 않았다. 아무리 아파트가 산속에 있고 아카시아가 제철이라 하기로서니 코앞에 있지도 않은 꽃의 향내가 이중으로 닫혀 있는 문틈으로 이리도 진하게 스며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오늘 새벽의 향취가 어제의 그것보다 훨씬 짙게 느껴지는 점도 심상치는 않았다.
가만 가만 짚어 본 향기는 거실 앞 발코니 쪽에서 흘러듣고 있었다. 그리로 통하는 미닫이를 열자, 그곳에 고여 있던 화향이 거실로 쏟아져들었다.
거기 발코니에, 빨래 건조대 너머 안쪽 구석에, 아직 풀지 않은 이삿짐 꾸러미들 사이에 키만 홀쭉한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대형 오지화분에 말뚝처럼 박힌 검은 나무 등걸 위로 수수깡처럼 가늘고 긴 예닐곱 대궁들이 잎을 피우고 있었다.
일 미터도 넘게 자라면서 짧지 않은 세월을 증언하듯 거칠거칠 마른 대궁들이 모질게 자란 수수(고양:高梁)의 그것 같은 이파리들을 우산처럼 펼쳐 들고 있었고, 그 위에 우듬지로 솟은 꽃대가 볼품없는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젓가락을 닮은 수직 꽃대에 안남미(安南米) 쌀알 같은 흰색 꽃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쥐똥나무꽃의 그것보다는 맑고 짙으면서 아카시아나 라일락의 그것만큼 강렬하지는 않은 향기였다.
물나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줄잡아 삼십 년을 동거해 온 그것의 존재를 내가 잊고 있었다. 십오륙 년쯤 전 어느 봄에 그것이 꽃을 피웠다고 아내가 반색하던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 웃자란 대궁들이 천장에 닿는다고 난감해 하는 아내에게 내다 버리라고 타박했던 기억 이후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필시 아내가 너무 자란 몇 대궁을 잘라내고 거실보다 천장이 높은 발코니로 옮겨 놨으리라. 그리하여 그곳 아내의 허술한 화원의 잡다한 풀 나무들 속에 묻혀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로 며칠 전에 이사를 오면서까지 내 눈에 띄지 않았음은 확실한 충격이었다.
아내가 물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것은 삼십 년도 더 전이었다. 내가 해운공사 부산지점에서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재봉틀 실패만한 원목 토막 하나가 수반위에 세워져 있기에 뭐냐고 물었더니 바로 그것이라 했다.
시답지도 않던 것이 촉잎을 틔우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말라붙은 듯 딱딱한 수피를 뚫고 대나무의 그것처럼 움터오른 순들이 겹겹의 순잎을 피워내는 것이었다. 여린 듯 당찬 듯 천천히 돋아나는, 연두색 줄무늬가 잡힌 초록 이파리들이었다.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입항하는 외항선원들이 들여오는 것이라 했다.
우연히 올라가 본 우리 회사의 동남아 취항 선박에도 선실마다 물나무가 흔했다. 제법 큰 것으로 몇 개를 구해 들고 퇴근했더니 아내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그로부터 아내의 물나무 수집욕에 불이 붙었고 나는 충직한 외조로 포기수를 늘여 갔다. 아는 선원이나 항해사들을 푸시킨의 금고기 이야기에 나오는 노인처럼 찾아다니면서……
몇 년 뒤, 서울로 이사 온 나의 아파트에는 서른 포기도 넘는 물나무가 가득했다. 대부분은 밑동 지름이 한 뼘을 넘는 것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맑고 싱싱한 잎을 피우고 있었다. 집들이 온 손님이나 이웃들이 처음 보는 초록 숲을 감탄하면서 탐을 내기도 했지만 아내는 들은 체하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꽃집 주인이 몇 포기만 사자고 애걸했을 때도 아내의 독점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숲은 푸르름을 더해 갔고, 아내는 아파트 속 초록 밀림의 호사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특히 눈 내리는 겨울 창가의 그것을 유난히도 대견해했다.
언제부턴가, 물나무에 대한 아내의 애착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돼 버린 아들놈들의 입시 전쟁에 휩싸이면서였을 것 같다. 물나무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희소가치가 소멸된 즈음이기도 했으리라.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집 안에 가득하던 그것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지금의 한 그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크고 굵은 생나무를 통째로 잘라낸, 뿌리로 갈라진 밑동의 지름이 한 뼘을 훨씬 넘는 등걸이었다. 처음에는 수반에서 키우다가 잔뿌리가 하얗게 엉길 때쯤 화분으로 옮겨 심는 것이었다.
물나무라 하기도 하고 행운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것의 정확한 이름이나 생태를 나는 알지 못한다. 열대 남양 지방의 물가에서 잘 자란다는 것과, 좀처럼 꽃이 피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이다.
무척 긴 시간 끝에 한 번씩 피어나는 꽃. 그러면서 운이 닿는 사람만이 그 꽃을 볼 수 있다는 나무. 그래서 행운목인가?
그것이 꽃을 피웠다. 막내 놈을 마저 성가시키고 며칠 전에 이사 온 이곳 대모산 기슭 아파트에서 슬며시 꽃을 피운 것이다. 기다림이나 기대를 한참 지나 존재마저 까맣게 잊힌 순간에 행운처럼 그렇게 다가온 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새싹과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함께 자라던 아들놈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떠나간 시간과 공간에 기적같이 피어난 그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아내에게 알리려고 안방으로 갔더니 아내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전에 없이 달라진 모습이다. 새벽마다 출근시간이 늦었다고 안달하는 막내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닦달하던 달포전의 모습은 간 데 없고, 웬만한 이삿짐은 풀지도 않고 밀어 둔 채 끝도 없이 늦잠을 잔다. 연년 혼사에 뒤이은 이사의 피로만은 아닌 것 같다.
깨울까 말까 망설이면서 들여다본 아내의 푸석한 얼굴에는 골 깊은 주름살이 가득 피어 있었고, 윤기 없는 손등과 마디 굵은 손가락들이 물나무 대궁처럼 거칠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차마 깨우지 못하고 물러나와 다시 마주한 물나무가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초록이 탈색된 연두빛 이파리와 겨울 수숫대처럼 바싹 마른 대궁, 백발 같은 꽃대의 모습이 자꾸 무엇에 겹치면서 애처로웠다. 그러면서 어제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나를 불렀을 그것의 간곡한 손짓을 무심히 지나쳤던 내가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나로 인해 고국을 떠나왔다가 향수마저 사그라진 듯 쇠잔한 물나무의 고향은 어디일까? 수마트라의 남단 땔룩베퉁. 뒷산이 화산무(火山霧)를 뿜고 있는 앞바다에 산호초가 구름처럼 번져나고, 키 낮은 목탄열차가 파초숲 속으로 뱀처럼 숨어들던 그곳일까? 아니면 자바의 동쪽 수라바야. 스콜이 씻어 내린 쪽빛 하늘에 남십자성 별빛이 곱게 뜨던 그 언저리일까? 그곳도 아니면, 당홍 가오리연(鳶)만 갈매기 떼처럼 떠있던 셀레베스의 하얀 모래 해안. 등탑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고 해질녘 등댓불만 야수의 눈빛처럼 반짝이던 그 어디쯤일까?
아내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린것들 안고 업고 땀이 향기롭던 시절을……. 아니면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넘나들던 살구꽃 고향 마을이라도…….
뒷산 숲의 뻐꾸기는 새벽마다 오던 내가 오지 않는다고 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대로 아내와 물나무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겠다. 그러다가 아내가 깨어나면 향기로운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러면 아내는 십오륙 년 전 그때만큼 반색하며 좋아할까?
물나무를 거실 안으로 들여 놔야겠다. 그러고는 나도 새벽마다 대모산 샘물을 길어 와서 그의 발등에 부어 줘야겠다.
아내와 물나무와 내가 셋이서 그런대로 두런두런 살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까맣게 잊어버린 어느 망각의 피안에서 또 한 번의 행운이 피어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