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1화)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

백구야 훤사(暄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떨어지지 마라 어주자(魚舟子)할까 하노라

퇴계 이황 선생의 시조로 전한다. 어떤 이들은 선생의 시가 아니라고 한다. 청량산 경치를 독차지하려는 욕심(?)과 선생의 인품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잖다는 사람들도 있다, 순수한 자연애의 욕심이야말로 정진의 본질이라 한다.

강원도 황지(黃池)에서 발원한 낙동강 원류가 태백 준봉들을 빠져나오려고 숨가쁜 사행(蛇行)을 거듭하면서 약 2백여 리를 흘러내린 지점에서 제법 강다운 면모를 차린다. 그래도 아직 강폭이 넓지 않고 산악지방의 경사는 급해서 좁고 깊은 여울이 세차게 휘돌아 치는 절벽 위에 청량산 열두 봉우리가 솟아 있다.

주봉의 높이가 870미터에 지나지 않는 청량은 높지도 크지도 않은 산이다. 외양마저 평범한 흙산 같아서 마음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도 않는다. 산발치에서 쳐다봐도 명산의 면모는 없다. 몇 구비를 올려 쳐봐도 영락없는 야산세에 그렇고 그런 수목이다 .

그러나 숨가쁜 실망이 허탈로 바뀌려 할 때 쯤, 대문을 들어서듯 산자락 하나를 헤쳐 들면 놀라운 청량 비경이 꿈결인양 다가선다. 하늘 아득한 수직봉우리들과 짙푸른 솔숲이다. 사 뭇 무심하다가 일순에 속가슴을 열어젖히는 반전에 놀라움은 잠재우기 어렵다. 의상, 자소, 경일, 금탑, 연화, 다섯 봉우리가 사방에서 마주보며 둘러서서 저마다 크고 작은 암봉들을 품어 안았다.

이중환 선생이 택리지에서 “청량산은 밖에서 바라보면 흙묏부리 두어 송이뿐이지만 들어가보면 사면이 기암절벽으로 둘러 있고, 그 높이가 만 길이나 되어서 형상을 형언하기 쉽지 않다.”고 한 표현이 절묘하다.

청량은 웅장하거나 위압적이지 않고 안온하여 다감스런 상이다. 하나같이 깎아지른 절벽아니면 촛대처럼 우뚝한 수직암봉이지만 검은 바탕의 석회질이어서 날카롭지 않고 도리어 푸근하다. 웃자란 바위 옷을 다보록히 입고 있는 암벽의 모습은 차라리 유현스럽기까지 하다. 청량산 바위 옷은 참으로 특이하다. 느타리버섯에 흡사한 것인 한 뼘도 넘게 자란다.

봉우리마다 푸른 솔숲을 머리에 이고 있다. 죽죽 자란 육송의 시뻘건 그루들이 진초록 솔잎더미를 하늘높이 받쳐 들고 있다. 흙 한 줌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위 위에서 저토록 훤칠한 솔숲의 자태가 기이하다. 난석 위의 풍란 같다. 풍란이 공기를 마시고 자라듯, 청량솔(淸凉松)은 차고 맑은 바람만으로 저리도 청정하게 성장하는가?

청량은 바위와 초목이 조화하여 자연의 경이를 자아내는 산이다. 성근 진달래가 연초록 솔빛과 어울리고 검은 그루터기의 산도화가 바위옷 암봉과 유정스럽다.

나의 청량산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막연한 그리움의 갈증과 일탈에의 유혹을 함께 앓고 있는 또래들끼리였다. 청량산은 강과 함께 있어서 좋았고 1박이면 다녀올만한 거리여서 편리했다. 그렇지만 그리 수월한 산행은 아니었다. 청량이 워낙 오지에 있었다.

안동에서 도산서원까지 태워다준 버스가 희뿌연 먼지 속으로 되돌아가버리면 거기서부터 30여리가 도봇길이었다. 흙 반 돌부리 반 좁은 오솔길이 강을 따라가기도 하고 작은 고개를 넘기도 하면서 낮은 풀숲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산협 가득 파란 강물이 고왔다. 건너편 기슭의 여나믄 채 초가동네가 강물에 어려 있었다. 살구꽃 더미에 파묻혀 있는 그 마을에는 내 그리움의 소녀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초가을 강에는 은어(銀魚)가 많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때쯤이면 산란을 위해 상류로 올라온 은어떼가 다투어 몰려들었다. 조약돌이 훤하게 드러나는 모래톱 위를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은어떼의 동작이 날렵했다.

강을 벗어나면 산길이었다. 여름 고갯길에는 패랭이, 원추리, 참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가을이면 서리맞은 속세풀 사이로 들국화가 향기로웠다.

▲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청량산을 오르며 / 맨 왼쪽이 필자이다

고개를 넘으면 다시 강이 나타났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활대처럼 굽어 도는 강물이 반달 모양의 하얀 모랫벌을 안고 있었고, 백사장 너머 얕은 산발치에는 30여 호의 기와집 동네가 앉아 있었다. 시인 이육사가 태어나서 자란 먼내(遠川)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이 마을에도 살구꽃이 피어 있었고, 마을 뒷산은 온통 진달래 밭이었다. 우리들은 모래밭에서 한나절을 뒹굴면서 ‘청포도 시’의 푸른바다는 아마도 저 강물일거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강마을에 청포도가 열리면 알마다 강물 빛이 배어들 것 같았다.

청량산 밑 마지막 동네가 ‘나분들’이라 했다. 동네 이름이 그렇기로 들판은커녕 반반한 밭뙈기 하나 없는 산골마을이었다. 강물 소리만 요란한 계곡에 초가 너댓채와 함석지붕 술도가 한 채가 마을의 전부였다.

도갓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제법 정갈한 장판방이었지만 방값은 받지 않았고, 탁주 두어 됫박 팔아주면 그것으로 인사가 되었다. 우리들도 막걸리를 사서 마셨다. 까까머리 학생 놈들이 술을 마신다고 일꾼들이 비아냥거렸지만 나무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우리들은 쌀을 주고 그들의 노란 조밥을 바꾸어 먹었고, 일꾼들은 주인 몰래 막걸리를 퍼다 주기도 했다.

새벽 강에는 물안개가 피어 있었다. 사공은 곡예를 하듯 날렵한 삿대질로 세찬 여울을 건네다 주었다. 청량산 들머리였다.

처음 만나는 청량산이 나긋나긋 비를 맞고 있었다. 산도화 꽃망울들이 함초롬히 젖어 있었고, 적막한 봉우리에는 낮은 구름 두어 송이가 걸려 있었다. 갈대 지붕의 단칸 암자가 산자락에 묻혀 있었다. 우리들의 인기척에 마흔 남짓한 보살이 구름을 헤치면서 나섰다.

“이 우중에 웬일들이시오?”

우리들은 제법 어른스레 말을 지어 대답했다.

“청량산 경관이 좋다기에 구경하러 왔습지요.”

“경치가 별 것이요? 보고나면 허망한 게지.”

보살의 고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로부터 적잖은 시간이 흘러간 지금, 나는 가끔 청량산을 찾는다. 도회지살이 도중 문득 마음이 삐걱일 때나, 새벽 기차소리에 뒤척이게 되는 날이면 으레 가벼운 행장을 집을 나선다. 내 푸르고 맑던 날의 추억이 나를 불러내는 탓이리라. 그렇지만 40여년의 세월 동안 내 추억의 원산지가 많이도 변모해버렸다.

은어떼가 경쾌하던 강줄기는 거대한 호수로 바뀌고 강변 오솔길과 살구꽅 동네는 물속 깊이 잠겨들었다. 고갯길의 산꽃들이야 변함없이 피고 지겠지만, 섬 아닌 섬이 되어 길마저 막혀버렸다. 먼내(遠川) 마을도 물에 잠기고, 육중한 콘크리트 다리가 얹힌 나분들 삿배 나루에는 여울소리가 멎었다.

술도가 마을마저 흔적 없이 사라지면서 산보다 정겨웠던 강줄기가 속절없는 추억 속으로 수몰되어 버린 셈이다. 그래도 바위옷 암봉들과 솔숲만은 옛 모습 그대로여서 가끔 찾아드는 내 발길이 사뭇 허망하지만은 않다. 서늘한 암벽에 등을 붙이고 서면, 꽃봉오리처럼 안으로만 피어난 산세가 더없이 아늑하고 솔숲을 넘는 바람이 여전히 차고도 맑다.

산이라고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적막하던 등성이에는 선객들의 발길이 빈번해지고 지난날의 보살봉은 자소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언제나 맑은 미소로 맞아주던, 그래서 우리들이 청량보살이라 불렀던 고운 자태의 종적도 암자와 함께 묘연하고 세월 따라 흩어진 옛 친구들 생각도 서운하다.

진정 마음 쓰이는 것은 휴일이면 수십 대씩 몰려오는 관광버스들이다. 구름 같은 인파가 계곡으로 밀려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들은 주위의 서원과 온천을 두르는 구경꾼들이어서 청량사(淸凉寺)까지만 왁자지껄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저만한 인파가 능선으로 올라온다면.......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청량산이 더 이상은 변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소문도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가끔 씩 찾아와서 일상에 지치고 상한 내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쉬어갈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앞으로 한 삼십년, 아니 그 절반만이라도....... 이 또한 나의 욕심인가? 아마도 대책 없는 나이에 가당찮은 과욕이리라.

의상봉 상공을 맴도는 솔개의 비상이 사공을 넘어선 듯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