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에 복무할 때였다. 휴가기간이 끝나고, 귀대 인사를 드리기 위해 사랑채로 건너갔더니 아버지께서도 출타 준비를 하고 게셨다. 읍내에 다녀올 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두루마기에 중절모 차림이었다.
아랫마을을 지나고 징검다리 개울을 건너서 버스 정류장까지 나오는 사이, 여럿 주민들이 아버지께 인사를 했다. 아버지의 외출이 오랜만인 듯, 그들의 인사가 극진했으므로 나는 그때마다 깍듯이 거수경례를 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의 모습에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이건만 소재지 마을 신작로 양편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오전에 한 번 뿐인 읍내 행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과 이들을 전송하러 나온 가족이나 친지들이었다. 버스에 탈 사람들이 들고 나온 가방과 보퉁이들이 길가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아버지는 주막집 툇마루에 걸터앉으시고 나는 그 옆에 서서 기다렸다.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므로 잠시라도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건장하게 보이는 남자 한 사람이 신작로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면장어른이라고 주위의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육군소령인가 대위로 예편한 어느 마을의 아무개라고 들은 바 있는 바로 그 인물일 터였다. 바짓가랑이를 싸서 묶은 소위의 당코바지에 목이 짧은 군화를 신고 있었다. 아마도 출근길인 것 같았다. 흡사 인천상륙 당시 해변을 걸어 나오던 맥아더 원수처럼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모자를 들어 올리면서 인사를 하셨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보지 못한 듯, 앞을 바라보며 걷기만 했다.
그가 나와 아버지의 정면을 통과하려할 때, 아버지는 아까보다 더 큰 동작으로 인사를 하셨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못 본 척하면서 시선을 치켜들고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야, 면장!” 하면서 고함을 질러버렸다.
주위의 모든 시선들이 내게 집중된 가운데 그가 나와 아버지 쪽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제야 “어르신, 이 젊은이가 누구입니까?” 하면서 아버지께 알은체했다.
아버지께서 자식을 잘못 훈육한 당신의 허물이라면서 극구 사과하시는 동안, 그는 나를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이치로 따져든다면 나도 그렇게 받아주겠지만 그가 완력으로 달려든다면 발길로 냅다 질러버릴 심산이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호통을 치시면서 더욱 간곡하게 사과를 하시자, 그는 못 이기는 척 돌아섰다. 그러면서 내가 들으라는 듯 아버지께 토를 달았다.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 참기야 하겠지만 아침 출근길에 이 무슨 봉변입니까?”라고. 그러나 그때 나로서도 당초에 소리를 지른 것이나 묵묵히 참은 것은 다 아버지의 체면 때문이었다. 군사정권 시절, 내가 해군소위 때의 일이었다.
나이 들어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성묘나 기타 문중 행사로 일 년에 두어 번씩 고향마을에 내려갈 때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남세스러운 회상이다. 그러나 아버지도 면장어른도 다 계시지 않으니 사죄를 드리고 용서를 빌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신작로에 나와 있던 주민들도 다 없어지고 이제는 알 만한 사람도 없건만, 너무나 부끄러워서 남모르게 몸까지 떨게 되는 젊은 날의 치기였다. 그러나 한편 그때 내게 쩌렁쩌렁 꾸중하시던 아버지가 새삼 그립다.
그날 해맑은 가을 아침, 중절모에 두루마기자락을 펄럭이면서 아랫마을 앞 징검다리 여울을 성큼성큼 건너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