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려괘(火山旅卦) (37화)

오동도 동백꽃, 까멜리아. 뒤마의 소설 ⌜동백꽃 부인⌟. 우리에겐 잘못 번역된 ⌜춘희(椿姬)⌟. 단 한 번 사랑의 열병으로 모든 것을 살라버린 비련. 꼬투리 째 떨어질지언정 꽃잎으로 흩날리지 않는 품격. 아직도 차가운 바닷가에서 저 혼자 붉어서 서러웠다. 2월을 갓 넘어선 남녘의 갯바람 속에서 나 또한 결연한 듯 외로워서 남모르게 서러웠다.

부산을 마지막으로 들렀다가, 이제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듯 허전한 서울로 돌아왔더니 항구도시의 지인들이 교대로 나를 찾아왔다. 한때 해운회사를 같이 다녔던 인연이자 지금은 그곳 어느 회사의 고위 중역들이었다. 되지도 않을 해운에 골몰하느라 애꿎은 이마나 넓히지 말고 이제는 쉽고 느슨하게 살아보자고 했다.

그들이 세 번을 다녀갔을 때, 내가 항구도시로 내려가서 그들의 회장을 만났다. 직원이 백 명 남짓한 규모의 판매 운송회사였다. 그들이 진정 나를 원한다면, 보잘 것도 없는 나를 조건 없이 던지리라 했다. 소재지가 서울이 아닌 것이 무엇보다 맘에 들었다. 넉넉잡아 십 년만 그렇게 지내고 나면 전원으로의 귀거래사를 불러도 충분하리라는 계산이었다. 내 급료나 직급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내게 본사와 서울사무소를 격일로 출근하는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내가 방계회사의 대표이사로 등록했을 때는 회장이 결재하기를 사양했다. 대표이사의 결정이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과분한 대우에 보람의 직장이었다. 여념 없이 몰두할 수 있는 행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천명을 바라보면서 가속도가 붙은 시간의 끝자락이 빠르고 정확하게 다가왔다.

주역 쉰여섯 번째 괘인 화산려괘의 괘사(卦辭)가 이제는 때가 되었음을 일러주고 있었다.

“나그네가 크게 형통할 수는 없으니 곧은 처신으로 길하며(여소형(旅小亨), 여정길(旅貞吉), 이에 때가 중하도다(여지시의대의재:旅之時義大矣哉).” 마지막 두 효(爻)의 효사가 결행을 재촉하고 있었다.

“화살 하나로 꿩을 잡았으니 마침내 명예와 복록이 크도다(사치일시망:射雉一矢亡, 종이예명:終以譽命). 그러나 자칫 새가 둥지를 태우는 격이니 나그네가 처음에는 웃으나 나중에는 울부짖음이라(조초기소:鳥楚基巢, 여인선소후호도:旅人先笑後號咷).” 누가 봐도 실세라 할 회장의 외아들이 내 밑에서 부사장으로 2년을 재직한 것이었다.

나의 돌연한 사의에 회장은 못 들은 척 외면하려 들었다. 그래도 묵살하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로 다섯 달을 기다렸지만 여전한 묵묵부답이었다. 서울 근교에서 운동을 하던 어느 날에는 도리어 이듬해의 계획까지 거론하는 것이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집무실로 올라간 나를 회장이 만류했다. 주위의 체면상 당신의 아들이 부사장이긴 하지만 아직은 나이도 어린데다 때도 아니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봤자 유예의 기간이 결코 길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것에의 미혹이 새의 둥지를 태우는 불씨가 된다는 이치를…… 그리고 내게도 주위의 체면이 있음을……

그때 회장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결별의 격식을 끝까지 견지해준 그의 배려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것만이 봉급쟁이를 전문경영인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 해운공사 영업부장 시절 3억불 운임수입탑 수상하고 당시 윤석민 회장과 함께

당초에 작정했던 시간을 남김없이 소진하고 나서 다시 홀가분해졌건만 나의 귀거래사는 아직도 준비되지 않았다. 막내 놈의 졸업학기등록까지 완벽하게 마쳤지만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서 쉽사리 잡힐 것 같았던 전원에의 꿈은 여전히 먼 하늘의 솔개처럼 맴돌고만 있었다.

아직은 벗어날 때가 아니라면, 기왕에 내 젊음을 투자했던 해운의 한 자락을 마지막 생업으로 경영하고 싶었다. 젊어서 갑으로 행세했던 분야를 늙어서 을의 자격으로 답사해보고 싶었다. 악업이었든 선업이었든 봄철에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가을에 내 손으로 수확해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 땀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껏 나의 삶은 언제나 누구에게 빚진 듯 꺼림칙했다. 해군장교 시절의 직무부담은 사병들의 노고에 미치지 못했다. 상선에 항해사로 승선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 망망대해에서의 내 직무는 천체를 관측해서 항로를 산출하는 일이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하급선원들이 별것도 아닌 그것에 감탄해 주었고 나는 그런 틈바구니에서 항해사의 급수를 높여가며 선장에까지 이르렀다.

삼 년여의 항해를 마치고 본사로 발령받았을 때는 과장이었다. 나보다 그리 어리지도 않은 과원들의 기안서류에 하찮은 수정만을 가한 뒤, 사장의 결재를 받아주는 것이 내 직무의 대부분이었다.

그 뒤의 직장에서는 그 나마의 부담도 없었다. 부하들의 성과를 이리저리 버무려서 회사의 실적으로 뭉뚱그리는 작업이 고작이었다. 아무런 긴장이나 고통도 없이 삶을 도모한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에게 기생(寄生)하는 일이다.

그간 대표이사 겸 주주로 있던 서울의 회사 하나도 정리하기로 했다. 꼭 십 년 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표를 제출하고 떠났던 해운회사시절의 부하들과 함께 설립한 회사였다. 회사가 착실히 성장하면서 연륜이 쌓이자, 그들이 조급해하는 것 같았다. 자기들도 사장이 되거나 독립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내가 물러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나의 제의에 이틀이나 뜸을 들인 그들의 대답은 고작 “사장님의 결심에 따르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해운회사 시절을 포함해서 이십여 년을 함께 한 사내들의 의리치고는 허탈한 마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원망하거나 자책할 일은 아니었다. 나의 미련 아니면 그들의 조급증이었을 바로 그것이 우리들 모두가 이미 통달해버린 산업사회의 실체임에야.

그럴수록 항구도시 쪽으로 맘이 쏠렸다. 거덜 나기 직전의 회사 하나를 사들였다. 내 땀으로 새로운 얼개를 엮고 내 인연으로 일감을 장만해서, 덜 영리한 만큼 더 우직한 항구의 사내들과 서로 감사하며 살고 싶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벌면 나누어 쓰고 축이 나면 내가 채워 넣으리라 했다.

해운계의 지인들이 의아해 했다. 서울의 회사를 버리면서 지방의 사무실을 새롭게 도모하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전원으로의 낙향도 아니지 않느냐며 핀잔하기도 했다.

두 회사의 사장을 자퇴한 뒤 새로운 고생을 자초하고 나서는 일련의 조치는 지난번 해운회사를 그만둘 때처럼 아내에게 비밀이었다. 만약에 미리 알렸다면 아내는 그때처럼 거품을 물고 나뒹굴었을 것이다. 아무런 물정도 모르는 내가 너무나 오만한 나머지 품 안의 복마저 발길로 차낸다면서……

그러나 아내도 언젠가는 알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나야말로 크지도 않은 복을 행여 다칠세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