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5화)

마을은 온통 안개였다. 남북으로 뻗은 왕복2차선 도로위에 구름 같은 안개가 강물처럼 고여 있었다. 도로 옆 둔덕의 샐비어 꽃밭에도, 호텔의 청대[靑竹] 숲에도 여백마다 솜사탕 같은 새벽 안개였다.

해수욕장 쪽은 더욱 풍성한 안개밭이었다. 모래펄도 바닷물도 안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길가의 횟집들과 숙박업소들마저 회백색 장막 뒤에서 새벽잠에 빠져 있어서 마을전체가 물밑 같은 정적이었다.

이 마을이 이렇게도 조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행락 인파와 자동차의 경적, 장사 고함이 탁류처럼 넘쳐흐르던 거리였다. 그러나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절이 피서철을 지났다는 것과 오늘은 주중의 평일이며 지금은 여명을 갓 지난 첫새벽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이것이 이 마을에 진면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안개에 묻힌 새벽 해안도로를 북쪽으로 나선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바다로 흘러드는 개울이 있고 거기서부터 사천항 포구까지 이어지는 삼십여 리 무인지경의 첫새벽을 걷고 싶었다. 동쪽으로 툭 터지는 바다와 반대편 언덕 위의 키 큰 금강송림이 상쾌하리라.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는 그곳 텅 빈 벌판에 아무렇지도 않게 피어 있는 가을 풀꽃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가을이면 왜 별것도 아닌 야생 풀꽃들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봄부터 여름 내내 독초라고 제쳐놨던 여뀌의 볼품없는 꽃대마저 대견스러운 정감으로 다가오는 연유는 뭘까. 가을에는 사람마다 마음들이 착해져서 풀꽃들의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움을 쓰다듬게 되는가. 아니면 불현듯 밀려드는 저마다의 외로움을 그들 풀꽃들에게 기대려는 것인가. 떠나간 그 사람보다는 그와 함께 오가던 길섶의 이름 모를 풀꽃들이 더욱 애틋해지는 가을의 정취는 도대체 무슨 넌센스일까.

해수욕장의 무지개 정문 안에도 안개 더미가 수북했다. 안개가 아니라면 십리바위, 오리바위 섬들이 오른쪽으로 스쳐 지났을 때쯤 숲이 시작되고 있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곰솔숲이었다. 자욱한 안개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솔숲의 모습이 북쪽 나라의 겨울풍경 같았다.

그곳 숲 속의 집 한 채가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다가갈수록 안개가 옅어지면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함석집이었다. 지붕과 울타리의 양철판들이 검붉게 녹슬어 있었지만 모습이 생소하지 않았다. 옛 모습 그대로였다.

사십여 년의 시간 저편에서 꿈결인 양 피어오르는 놀라움이었다. 오래 전에 봤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 같은 감격이었다. 교통사고로 일체의 기억을 상실했던 주인공이 마침내 안개와 꽃가지를 헤치면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찾아들던, ‘마음의 행로’라는 서양 영화였던가.

지금껏 피서철과 휴일에 이곳을 수도 없이 다녀갔건만 그 집이 거기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마침 두어 집 건너에 담배 가게가 있었다. 삐걱이는 미닫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한참 후에야 몸뻬 차림의 주인 할머니가 하품을 하면서 나섰다.

“웬 안개람?”

담배를 한 갑 사면서 내가 물었다. 이웃의 함석집이 바로 명자네가 아니냐고……. 그러자 흠칫하는 그녀의 안면에 경계의 기색이 스쳤다. 어쩌면 나 사이의 어떤 사연을 예감하는 듯한 눈치였다.

“선생이 이 명자를 어떻게…….”

내가 우유와 빵을 추가로 주문하면서 마루에 걸터앉자 그녀도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어차피 새벽잠은 놓쳐버렸다는 듯, 허리춤에서 담배 한 개비를 뽑아들면서 나보다 더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다가앉았다. 그녀와 나의 담배연기가 안개 속으로 섞여들었다.

꼭 사십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가을이었다. 나와 친구 두 명이 경포대 바닷가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두 명이 경포대 바닷가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해안의 출입이 자유로웠으므로 해수욕장의 모래밭이 더없이 훌륭한 야영장이었다. 장비래야 군용 3인형 A텐트가 고작이었지만, 젊음의 갈증으로 들떠 있던 우리들에겐 최상의 도피처요 보름자리였다. 인적 없는 바닷가 모래펄이 고즈넉하고 아늑했다.

▲ 고교시절 학우들과 경포대에서 / 오른쪽에서 2번째가 필자이다

그날 새벽에도 경포대는 짙은 안개였고 나는 바닷가 물결을 따라 북쪽으로 걷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차르르 차르르 밀려드는 포말들의 파열음이 그리움의 속삼인인 양 감미로우면서 한편으로는 무척 외로웠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저만치 앞쪽 물가에서 흐릿한 형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듯, 정지해 있는 듯, 무슨 짐승 같기도 하고 바위덩이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다가가 본 정경이 뜻밖이었다. 어떤 소녀가 젖먹이 아기를 안고 앉아 있었다. 칭얼대는 동생을 달래느라 나의 접근조차 모르고 있었다. 인근에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한적한 바닷가, 꼭두새벽의 안개와 냉기 속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이 신기했다.

동생을 어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깜짝 놀라면서 쳐다보는 얼굴이 예뻤다. 경포초등학교 5학년이며 이름은 이 명자라 했다. 집은 언덕 너머 솔숲 속에 있지만 새벽 바다가 좋아서 나왔다고 했다.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모래펄 너머 솔밭 속에 제법 큰 마을이 있었다. 강릉에서 해변을 걸어 올라왔던 우리들이 몰랐을 뿐, 경포대라는 기차역까지 있었다. 마을은 아직도 새벽잠에 잠겨 있었다. 유독 큰 함석집에 인기척이 있었다. 밤을 새운 석유램프의 불빛이 안개 속에서 무리를 짓고 있었다. 술집이었다.

새벽에 입항한 어부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삼십 대 중반쯤의 여인이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단정한 앞치마 차림에 소매를 걷어 올린 여인의 자태가 고왔다. 어부들이 그녀에게 농지거리를 해대면서 떠들고 있었다. 그런 어부들이 원망스럽고 그들에게 시달리는 여인이 애처로웠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명자네 집이며 그녀의 어머니일 것이었다. 명자가 새벽 바다로 나간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 세상이 미워졌다.

그날 밤, 경포호수는 으스름 달빛이었다. 하얗게 숲을 이룬 물억새꽃 더미 속에서 이름 모를 물새들이 밤을 새워 울었고 나는 명자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슬펐다. 명자가 가여우면서 사랑스러웠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어부 몇 놈을 때려눕히고 싶었다.

“명자 어머니가 미인이었지요. 죽은 지 오래 됐어요. 명자 또한 대단했고요. 키까지 늘씬해서 인근의 총각들이 줄줄 따라다녔지요.”

할머니는 담배를 다시 붙여 물었고 내가 이야기의 방향을 틀었다.

“그때는 가오리 잡이 어선들도 이곳으로 들어왔어요.”

“어선뿐이던가요. 기차 화통이 바로 요 앞까지 달려들곤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다 변하고 떠났어요. 여태 살아있는 사람도 나뿐이고요.”

명자는 농촌으로 시집가서 외손자까지 두었다고 했다. 명자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내 연락처를 적어 달라고 했다. 명절마다 제 어머니 산소를 다녀가는 그녀에게 전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제안을 했다. 명자가 오거든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 두시라고……. 그러면 불원간 내가 다시 들르겠노라면서……. 그러고는 가게를 나섰다.

안개가 거의 걷혀 있었다. 이제 곧 찬란한 일출이 전개되려나 보았다. 어서 빨리 마을을 벗어나서 초가을 햇살 아래 해맑은 풀꽃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 명자와 내가 만날 수는 있을까?

인연이라면 인연일 그것이 맺어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어서 만나고 싶어 하는 외에 내가 언제 이곳을 다시 들러야 하며, 일흔도 훨씬 넘은 할머니가 그때까지 살아 계셔야 되는 필요충분조건의 충족.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아무런 내용도 없는, 저 혼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 같은……. 새삼 풀꽃들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