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7화)

옛 직장생활 시절의 부하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내가 부장으로 있던 부서의 평직원이었는데 지금은 상무이사라 한다.

축하한다는 나의 인사에, 자신은 아직도 머슴의 신세라며 내숭을 떨었다. 네가 무슨 머슴만큼이나 되느냐고 했더니 못 알아듣는 눈치여서,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겨를도 없이 시달리는 봉급쟁이가 머슴보다 나을 것이 뭐냐고 우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요즈음의 직장생활이 지난날의 머슴살이만큼 당당하기는 쉽지 않다고 바로잡아 주자 머쓱해 했다.

어릴 적 고향집에는 머슴이 있었다. 장딴지의 알통이 모과덩이처럼 튀어나온, 인근에서 새경이 제일 센 상머슴이었다. 그것은 최고등급의 머슴에 대한 호칭이었다. 체격도 체격이지만 경륜 또한 지긋해서 한 해의 농사쯤은 훤하게 꿸 수 있는 경지이기도 했다. 거기에 모내기 무논의 써레질까지 능숙해서 마을 전체가 그렇게 공인해 주는 자격이었다.

그만은 못하지만, 누가 봐도 손색없는 장골의 체격에 곡식 선 밭고랑의 보습질을 할 만하면 중머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어린 머슴은 꼴머슴이었다. 먹고 자면서 명절에 입성 두어 벌을 얻어 입는 외에 새경이 따로 없는 꼴머슴의 임무는 소를 거두는 일과 잔심부름이었다. 산야의 꼴을 캐거나 베어 와서 쇠죽을 끓이는 것도 당연 그의 몫이었다. 각설하고…….

머슴의 사전적 의미가 ‘농가에서 고용살이하는 사내’로 되어 있지만, 그들의 고용살이가 오늘의 직장살이만큼 각박하지는 않았다. 염량(炎凉)과 주야를 불철코 시달리지도 않았거니와, 들고 나는 제반 거취가 일방적으로 휘둘릴 이치도 아니었다. 농사가 생업의 근본(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었던 그 시절에는 노사 양측이 충분히 품위 있고 정중했던 것이었다.

추수가 끝난 전답에 가을보리와 마늘을 갈고 나면 한 해의 농사는 끝이었다. 그러나 설까지는 두어 달이 남아 있어서 머슴들은 땔나무 비축에 나선다. 그럴 때면 새벽마다 길마에 걸채를 얹은 소들의 행렬이 인근 산중으로 떠나고, 저녁마다 고샅에 꽉 차는 나뭇짐 바리들이 마을로 밀려든다. 그러면서 집집의 나뭇더미가 쑥쑥 자라 오르고, 집채보다 더 크고 높아진 더미 위로 청솔 이엉이 이어지면 농가의 추수동장(秋收冬藏)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면서 머슴의 일 년 고용살이도 끝을 맺게 된다.

작별을 앞둔 머슴과 주인이 연중 두 번째의 겸상(兼床)을 한다. 그간 서로의 노고와 배려에 인사를 차리면서 격의 없는 대작(對酌)을 한다. 그러나 내년의 농사나 재고용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러고는 조청(造淸)이나 곶감 등 설맞이 먹을거리를 싸서 보내면서 작별을 한다. 마치 사랑방에서 며칠을 유했다가 떠나는 나그네와 주인같이,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처럼 그렇게 천연스럽고 정중하게…….

그러나 설 보름을 쇠고 나면 노사의 물밑 접촉이 활발해진다. 음력 2월초하룻날의 영등제를 올리고 나면 바로 농사철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먼저 다급해지는 것은 언제나 주인 쪽이었다. 달포 전에 떠나보냈던 작년의 머슴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집안의 흉이 된다. 그것은 지난해의 노사불화를 뜻하면서 자연 주인 쪽의 허물이 되는 것이었다.

주인 측의 거간이 머슴을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장(場)거리 주막으로 불러내기도 하면서 은밀한 정성을 들이지만 타결이 수월하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그들의 흥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상머슴의 경우에는 마을의 전 노사가 연관되는 것이어서, 머슴들은 머슴들끼리 동네 초당방에서, 주인 측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웃 사랑방에서 눈에 띄지 않게 회동하면서 각 진경의 복안과 이해(利害)를 조율하는 것이었다.

겨울을 넘길 것 같던 상머슴의 협상이 어느 밤에 갑자기 성사되고 나면 동네의 나머지 흥정들은 바로 끝을 맺는다. 상머슴의 새경에 각자의 등급과 차등치만 적용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노사와 마을 전체가 공지하는 사항이었다. 이렇게 해서 파격적인 우대도, 편파적인 홀대도 없는 고용계약들이 마무리되면 마을은 바로 새로운 한 해의 농사로 몰입해간다.

그것은 해마다 영등절의 코앞이었으며, 언제나 주인 측에서 간청하는 격식을 차리고 난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중 단 두 번뿐인 주인과 머슴의 겸상 중 첫 번째의 대작이었다. 그러면서 머슴은 종속의 복부(僕夫)가 아닌 동반의 조력자(助力者)가 되는 것이었다.

▲ 고교시절, 가족과 함께 / 이때 우리집에는 머슴이 있었다

못자리를 잡고 볍씨를 내는 일, 대소가내의 품앗이와 모내기 등 농사 일체가 그의 주관(主管)이었다. 당연 그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지 않았다. 사랑채가 주인의 권위라면 초당채는 그의 집무처였다. 한 해 농사의 산실인 그곳은 그만의 성역이어서 주인조차도 얼씬하지 않았다.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으면 그때까지 일을 하는 고마움이요, 그렇지 않으면 내일을 위한 휴식이려니 할 따름이었다.

밥상의 차림새도 주인의 그것과 진배없었다. 간잽이일 망정 고등어 한 토막 정도는 끊이지 않았으며, 옥은 식기의 고봉밥은 주인의 그것보다 더 높았다. 거기에 작은 대야만한 놋대접의 가양농주(家釀農酒) 또한 끼니마다의 필수 식단이었다.

칠석절 즈음이면 더위가 고비를 넘으면서 논바닥의 벼들도 성숙기로 누그려든다. 그러나 세벌논 매기를 막 끝낸 머슴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마련이었다. 갈잎처럼 예리한 벼 잎에 사정없이 긁히고 베인 얼굴이며 목덜미, 기진맥진의 체력이다. 오죽했으면 세벌논을 매고 나면 팔자에도 없는 문둥이가 된다고 했을까.

머슴들의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이때의 농가 별식(別食)이 바로 차농찌이다. 찹쌀가루만으로 두툼하고 큼직하게 부친 전(煎)이었다. 일꾼들의 골병을 풀어내고 원기를 채우는 효능이라 했다. 당연 머슴들을 겨냥한 특식이어서, 아직은 무더운 어느 하루의 해으름이면, 집집에서 솥뚜껑을 뒤집어 걸고 분디 기름을 발라가며 구워낸, 연잎만한 차농찌들이 동네 초당으로 모여든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마을 머슴들이 주관하는 차농찌 품평회가 열린다.

그러나 품평의 우열이나 등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저녁 늦게 귀가하는 머슴들은 저마다 “올해도 우리 집이 일등이시더.”라면서 인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일꾼을 거두는 일이 농사의 근본임을 깨우치려는 풍습이었다.

머슴이라고 해서 대접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지깽이도 제 몫을 찾아서 한다는 모내기나 추수 등의 농번기에는 그의 가족 전부가 주인집의 농사에 합류한다. 그리하여 두 집안이 십여 일의 혼연일체를 겪고 나면, 노사라는 것도 결국은 상호보완의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약간의 사례가 전해지긴 하지만 그것도 사양에 사양을 거듭한 두 안주인끼리의 우의로서였다.

어느 매섭게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더운 세숫물을 받으러 쇠죽간으로 갔더니 머슴이 짚단을 물에 담그고 있었다. 오늘은 산으로 나무하러 가는 대신 초당방에서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엮는 등 짚일을 하려는 가 보았다. 그런데 조반을 마친 머슴이 지게를 덜거덕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사랑방 문이 열리면서 아버님의 말씀이 있었다.

“이 사람아 오늘 같은 날은 쉬도록 하게.”

그러자 머슴은, 요만한 날씨에 별말씀을 하신다며 말대답을 했다. 아버님께서 제법 큰 목소리로 나무라는 듯 만류하시자, 머슴은 “날씨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쥔 어른이 그리 말씀하시니…….”라면서 지게 대신 짚단을 건져 들고 초당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열 살이 될까 말까 했을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훨씬 뒤에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머슴에 대한 주인의 후의였다. 그러나 사실은 주인에 대한 머슴의 배려였다. 그런 날씨에 머슴이 지게를 메고 나선다면 그것은 주인의 씻을 수 없는 허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머슴의 자의(自意)만으로 행할 수는 없는 배려여서, 주인의 사전 재가를 받는 것이 도리였던 것이었다.

당시의 주인과 머슴들은 상명하복의 획일성(동이불화:同而不和)보다는 상호존중을 통한 균형과 조화(화이부동:和而不同)의 시너지효과를 숭상할 줄 알았던 것일까? 그래서 추위가 매서운 겨울 아침 마당에서도 노사가 서로 대등한 수준의 차원 높은 지능 게임을 벌이곤 했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