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산악특공대가 까치집처럼 올라앉은 그들의 산채 하나를 불태우고 나면 이튿날엔 인근의 일본 관서나 부대가 반드시 파괴되곤 했다. 어쩌면 리사의 아버지도 고산족 토벌을 위해 화렌으로 파견되었던 총독부의 요원이었을까?
그녀가 태어나던 해에 해방이 되면서 아버지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지금껏 어머니와 둘이서 화렌에서 살다가 주위의 권고로 얼마 전에 혼자만 지룽으로 이주해 왔다고 했다.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와 함께 살리라 했다.
언젠가 그녀가 쉬는 날이면 내게 화렌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젠가라는 약속의 시한이 모호했고 감미로운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빨라서 나의 실습기간이 어처구니없이 끝나 버렸다.
그로부터 삼 년 뒤, 나의 항해는 다시 이어졌지만 항로가 번번이 타이완을 비켜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남아 쪽에서 한국이나 일본으로 북상할 때면 반드시 타이완의 동해안을 바짝 스치는 항로였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해와 일본의 남해안으로 흐르는 쿠로시오(흑조:黑潮) 해류가 엄청난 힘으로 배를 밀어주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쌍안경의 비율을 최대한 높여 들고 산맥과 해안을 살피곤 했다. 중천으로 치솟은 준봉들의 허리는 구름에 잠겨 있었고 산맥 발치의 해안에는 자그마한 화렌항이 나직이 앉아 있었다. 간혹 구름이 열릴 때면 병풍처럼 전개되는 산수화 속에서 접시꽃이 흐드러지고 꾸냥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사용하던 일본판 해도(海圖)에는 타이완의 양대 준봉인 위산(옥산:玉山)과 쉐산(설산:雪山)이 신고산(新高山), 차고산(次高山)으로 표기되고 화렌항이 ‘카렌코우’라는 일본 발음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하등의 거리낌은 없었다.
다만 리사가 지금쯤은 화렌에서 살고 있을까, 결혼이야 했겠지 하면서 안개빛 조명과 그녀 눈동자의 회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얼마 뒤, 나의 항해생활이 끝나면서 그녀와 산띠꾸냥, 접시꽃의 연원이었던 화렌항과 산맥마저 대양의 항적(航跡)처럼 내 의식에서 지워져 갔다.
타이베이에서 화렌까지는 기차로 세 시간 반 거리였다. 국내의 현대에서 제작된 열여덟 량의 기차가 긴긴 배암처럼 무수한 협곡과 터널을 지나가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까마아득한 계곡과 차일(遮日)만한 하늘 조각뿐이었다.
이윽고 시계가 툭 터지면서 활짝 열린 바다가 차창 아래로 달려들더니 이내 종착역 화렌이었다. 산업이라곤 시멘트 공장과 비취옥(翡翠玉) 가공이 전부였지만 그런대로 해항(海港)에 공항까지 갖춘 아담한 시가지였다.
고산족의 후예들이 그곳에 깃들어 있었다. 그들만의 전용 공연장에서 그들 고유의 의상과 분장으로 자신들의 전통을 춤과 노래로 선보이고 있었다. 허술한 원색 차림과 성의 없는 억지신명으로 관광객들의 호의를 구걸하는 모습들이 남루했다.
산띠꾸냥의 후배들은 삥랑(빈랑:檳榔)이라는 풋 열매를 팔고 있었다. 율무 이삭처럼 생긴 것을 이파리 째 씹어 먹는 그것은 카페인 성분의 각성제라 했다. 의당 운전수나 야간 근무자 등이 주 고객이기 마련이어서, 그들의 가게는 심야에만 불을 켜는, 한적한 도로변의 단칸 박스였다.
그곳에서는 간단한 스킨십도 허용되는 듯, 흐릿한 보랏빛 조명 아래 비키니 수영복보다 더 대담한 반라의 차림으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졸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이 구차스러워서 서글펐다. 한시 빨리 산속으로 달려가서 야성의 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타이루각(태노각:太魯閣) 관문을 통과한 관광버스가 막힌 듯 열린 협곡을 끝도 없이 돌아들면서 고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수직암벽을 ㄷ자로 파고든 채 사다리타기를 하듯 양안을 넘나드는 벼랑길이었다. 가도 가도 까마득한 암벽과 빠끔한 하늘, 아스라한 계곡의, 원류를 가늠할 길 없는 물소리뿐이었다.
그러기를 반나절, 버스가 오던 길로 돌아섰을 때까지도 접시꽃 마을이란 흔적조차 없었다. 소중한 무엇 하나를 연유도 모르는 채 잃어버린 듯 서운했다. 그러나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서야 마음을 되잡을 수 있었다. 최고봉인 위산(옥산:玉山)의 높이가 3,952미터나 되지만 버스의 반환점은 고도가 500미터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의 발길은 기슭의 기슭에 맴돌았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화렌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동쪽으로 솟구치자 바로 망망 태평양 상공이었다. 일몰을 준비하는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 엄숙한 암청색이었고, 쿠로시오(흑조:黑潮)를 편승하는 항행선들은 여전히 줄을 지어 북상하고 있었다. 아직은 수평선이 또렷하건만 저마다 항해등(航海燈)을 켜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타고 앉은 비행기의 왼쪽 날개 끝에도 빨강 좌현등(左舷燈)이 들어와 있었다.
기수(機首)가 북서쪽으로 침로를 잡자, 동지나해 특유의 찬란한 저녁놀이 우람한 산맥 위에서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노을빛을 닮은 접시꽃 마을이 있어서, 이제 곧 달밤이면 꾸냥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찾아가 보고 싶은 곳. 지금처럼 안일한 자세로야 어림도 없겠지만, 약간의 준비와 훈련을 보탠다면 아직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도전. 그러나 한편, 영원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기도 한 내 젊음의 서정. 지금은 화렌 어디쯤에 살고 있을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 리사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