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이 경문 군,
그는 참으로 신묘한 인물이라 할 만하다. 회갑을 지나 전공옹(電空翁)의 명예를 코앞에 두었건만, 그는 지금껏 그 흔한 휴대전화기 한 번 가져 본 일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오륙도(五六盜:56세까지 직장에 있으면 도둑이라는 뜻으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직장에서 내몰리는 직장인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너머의 방콕족도 아니거니와 정보통신의 물결을 도외시한 채 살고 있는 무슨 수도승도 아니다.
그는 엄연한 선박회사의 중역이며 그의 국제해운 업무는 바로 디지털 정보화의 첨단 영역이다. 그런 그의 휴대용 전화기에 대한 결벽증은 가히 불가사의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영문 이니셜인 G.M을 따서 괴물이라 부를 수밖에……
괴물과의 문명사회 공존이 쉽지 않았다. 그가 사무실과 집을 비운 시간에는 도무지 소통의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니 한창 성수기(?)인 친구들의 부모 흉사 등 돌발 사태에는 그의 참여가 소원해지기 마련이었다.
설사 유선상의 통화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내나 가족의 교환으로 연결되는 통화는 왠지 꺼림칙하기만 했다. 통신의 기본인 비밀도 보장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것보다는 공식적이 아닌 일로 그를 불러낼 때면 내가 무슨 남의 가정파괴범이라도 되는 듯한 자격지심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마다 그에게 휴대전화를 권해 보지만 번번이 마이동풍이었다. 없어도 되는 촉수를 구태여 달고 다니면서 창조주의 선물인 프라이버시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자초해서 유린당할 이치는 죽어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그의 부인에게 부탁을 넣어봤다. 그랬더니 그녀마저 말도 마시라며 손사래를 쳤다. 자신을 위시한 친지들과 성가해 나간 자식들이, 제발 남들처럼 편리하게 살아 보자고 하소연을 해도 영 막무가내라는 것이었다.
동창회에서의 일도 있었다. 총무가 긴급제안을 했다. 동기생들 중 유독 이 경문 군만 핸드폰이 없어서 매번의 연락에 이중고를 치르고 있으니 동창회 기금으로 그에게 전화기를 한 대 사주자고…… 얼핏 농담처럼 들릴지 몰라도 총무로서는 자못 절실한 사안일 것이었다. 그러자 다혈질의 동기생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야, 이 경문! 너는 우리들의 전화번호를 꿰고 있으니 네놈 꼴리는 대로 전화질이고, 우리들은 네놈으로부터 완벽하게 외면당하는 모양인데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냐고? 네놈이 해운회사 중역이라니 잘 알겠지. 미국 발티모어던가 노오코프 근처의 누드 비치 말이야. 남녀노소가 발가벗고 드나드는 그곳을 네놈은 정장에 코트 차림으로 출입하는 격이지. 이게 될 일이냐고? 만약에 네놈이 깔치 하나를 꼬드겨서 M.T(모텔)에라도 갔다고 쳐 봐. 그녀가 샤워를 마친 뒤 타월 한 장만 걸치고 나오는데 네놈은 구두끈도 풀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어? 백중 백 그녀는 네놈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고 달아나겠지. 야, 이 경문! 우리는 홀랑 벗었는데 네놈은 왜 겹겹이야? 네놈이 요즘의 어느 TV 연속극 ‘왕과 나’에 나오는 뿌리 잘린 내시라도 되느냐고”
천하의 이 경문도 이번에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완벽한 넉 아웃은 몰라도 기술적 다운쯤은 너끈할 것 같았다. 다혈질의 동기생이 종횡으로 휘두른 펀치에는 우리들 모두의 무게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모임에 나온 그는 여전한 오뚝이였다. 초등학생들까지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두드려대는 세태는 바로 분별이 모자라는 기성인들의 책임이라면서 오히려 훈계조였다. 그러면서 이제 곧 설익은 이진법문명이 세상을 터무니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리라는 예언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이로서 그의 휴대전화 무용론 내지 위해론은 반석 위로 올라앉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은 그와 관련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것 없이도 불편하지 않은, 어쩌면 우리들과 다른 만큼 우리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부각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를 딸깍발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것은 일석 이희승 님의 수필 ‘딸깍발이’에 나오는 남산골샌님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세태에 쏠림 없이 옹골차게 살아가는 선비정신의 전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일석 선생님과 동성동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나 또한 나도 몰래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일가견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별 다르지 않다는 근거에서였다. 남들과 다른 주장이나 작업을 어느 정도 지속하다 보면 자연스레 형성되는 독특의 경지가 바로 그것이라는 논리였다. 산야를 쏘다니며 풀뿌리를 채집하다 보면 어느새 야생화의 전문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분명 그는 일가견을 이룬 인물이었다. 그도 언젠가는 전화기 없이는 배기지 못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긴 있었지만 나는 그의 불굴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이제 곧 직장을 그만둘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의 전화기에 대한 면역력이 더욱 신장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생소한 번호라서 누군가 하면서 받았더니 바로 그였다.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휴대전화기 보기를 복더위에 장작불 보듯 하던 그가 남의 것을 빌리면서까지 전화를 걸었다면 필시 예삿일은 아닐 터였다. 더구나 그가 이야기를 돌리면서 머뭇거리는 것으로 봐서 내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는 것 같았다.
충분히 뜸을 들인 그의 전언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드디어 전화기를 구입했으며, 감격의 개시 통화를 내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동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야 이 새끼!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러고는 전화기를 닫아버렸다. 갑자기 차가운 외풍(外風) 한 자락이 내 가슴께로 스치는 것 같았다.
글로벌화의 미명이 몰고 온 디지털 정보화의 쓰나미에 휩쓸리면서 하나같은 두루뭉수리로 살아가는 시대에, 그만은 최후의 로맨티스트이기를 바랐던 내 염원이 산산조각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편 충분히 외로웠을 그가 안쓰럽고 이제는 킬ㄹ 맞춘 그와 나, 허물없는 무지렁이끼리의 동병상련이 반가웠다.
그래도 한 가닥 남는 미련은, IT(정보기술)의 물결에 합류하지 못하면 ET(외계인)가 되기라도 하는 세상이란 말인가?
